"저에게 봉사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조금이라도 대가를 바란다면 봉사라고 할 수 없지요."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서 맞춤양복점을 운영하는 황기철(57) 대표는 소아마비로 어릴 적부터 다리를 절지만 봉사에 관한 한 '달인'의 경지에 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 증세로 여러 병원을 찾았으나 결국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고 부모도 잇따라 세상과 이별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학업은 엄두도 못 냈다.
"그때 기술자가 되라는 집안 어르신의 권유로 열여섯의 나이에 안동에서 대구로 왔습니다."
대구시내 한 양복점에서 청소와 온갖 심부름을 하며 양복 기술을 익힌 그는 9년 만에 자신의 가게를 차릴 만큼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삶은 자신의 노력만큼 순탄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부터 쏟아진 기성복과 IMF로 파산위기에 몰리면서 가게를 옮겨 의류 수선업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중 세상에는 자신보다 더 어렵게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이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의류 수선업 1년 만에 처음에 문을 열었던 양복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때 아내와 약속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자고요."
황 대표는 이런 결심 아래 2006년 1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대구시 남구 봉덕동 새마을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불우학생 돕기, 노인 무료급식 운동을 폈고 명절마다 인근 홀몸노인들에게 겨울 윗도리를 무료 제공했으며 겨울나기 연탄을 공급했다. 대구 남구청은 이런 그의 봉사정신을 높이 사 올 5월 '남구 다사랑 알리미 위원'에 위촉, 봉사의 끈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이뿐 아니라 황 대표는 2007년 일본 시즈오카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에 출전해 순수양복 부문에서 국내 최초로 금메달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국제대회 출전 요청을 받은 그가 합숙훈련 중 첫째 딸이 파열성 뇌동맥류로 쓰러지는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룬 쾌거였다. 이 국위 선양의 공로로 그는 이듬해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양복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국내유명패션업계에서 스카우트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다며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저의 솜씨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잊혀 가는 양복점의 이름을 지켜갈 것이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계기로 앞으로도 봉사의 끈은 놓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글'사진 권영시 시민기자 kwonysi@hanmail.net
멘토: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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