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착한' 작명이 대세다. 정확히 말하면 작명 행위가 착한 게 아니라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단어 앞에 붙이는 게 트렌드라는 얘기다. '착한 커피'(생산자들에게 제값을 지불하는 '공정무역'으로 수입한 원두로 만든 커피), '착한 가게'(각 지자체가 지정한 물가안정 모범업소), '착한 남자'(방송 중인 인기 드라마) 등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만들어진 단어의 뜻이 뭔가 어색하다. '착한'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한'. 주로 사람의 언행이나 마음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제품, 상표, 기업, 단체 등 무생물의 이름에도 '착한'을 붙이는 게 요즘 세태다. 그 배경과 이면을 살펴봤다.
◆'착한'='공존'과 '나눔'의 수식어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착한'이라는 단어를 입력해봤다. '착한 고기' '착한 낙지' '착한 캠핑' '착한 여행' '착한 언니'(의류쇼핑몰) 등 다양한 이름의 사이트 목록이 수십 페이지나 떴다. 대부분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업체 상호명이었다. 그 특성을 살펴보니 가격이 저렴하거나(일명 '착한 가격'), 제품 원재료의 생산 과정이 친환경적이거나, 아니면 별 뜻 없이 '그냥' 붙이는 식이었다.
이러한 '착한'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아름다운' 가게가 있다.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에 출범한 국내 사회적 기업의 이름이다. 시민들이 낡거나 오래된 물건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면 다른 시민들이 다시 물건을 구입한다. 그러면서 자원순환, 환경보호 등을 통한 '공존'의 가치를 추구한다. 수익금은 결식아동이나 극빈자 돕기 등에 쓰이고, 시민들은 자원봉사로 아름다운 가게 운영에 참여한다. '나눔'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착한 제품'의 원조도 2006년 아름다운 가게에서 나왔다. 원조는 '공정무역 커피'다. 원두의 중간 유통 과정을 없애 거품을 뺀 가격의 커피를 소비자에게 공급한다. 또 커피 생산 국가에 일정 수준 이상의 원두 값을 지불한다. 세계적 대기업의 횡포에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된 원두 가격을 맞추느라 노동력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커피 생산 국가의 현실을 개선한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공정무역 커피는 '착한 소비' 트렌드의 시초도 됐다.
이후 공존과 나눔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정부와 지자체도 정책이나 사업 명칭에 '착한'을 붙이기 시작했다. '착한 가게'가 대표적이다. 짜장면 한 그릇에 2천원, 이발비 7천원 등 저렴한 가격은 물론 일정 기간 이상 사업장을 유지하고 있고, 주위 평판도 좋은 가게를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것. 서민들에게 부담 없는 소비를 권장하는 것은 물론 소상공인들에게 대출자금을 지원하는 등 골목 경제를 살리며 공존과 나눔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지난해까지 전국의 2천940곳이 선정됐다.
최근 '착한'을 강조한 '더 착한'을 붙인 명칭도 등장하고 있다. '더 착한 서울기업'은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주민 삶의 질도 높이는 사회적 기업에게 지난해부터 서울시가 부여하고 있는 브랜드다. 서울시는 "착한 기업들 중 가장 착한 기업을 골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비슷한 맥락에서 화장품,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 등도 최근 '착한'이 아닌 '더 착한'을 상호명 앞에 붙이고 있다. '착한'은 단순히 나눔과 공존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에 더해 '마케팅'의 일환으로 변모하고 있다.
◆정말 착한 거 맞아? 반어법, 오용, 남용…
최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사랑하던 여자의 배신을 알아차린 남자가 복수를 계획하며 벌어지는 '나쁜 남자'의 이야기다.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는 김진원 PD는 "'착하게 살자'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인데 건달들이 팔에 '차카게 살자'로 문신을 새기는 등 희화가 많이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드라마 속 나쁜 남자를 반어법으로 '착하다'고 표현했다"고 밝혔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착한 게 정말 착한 게 맞느냐"는 반문이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착한 가게로 지정된 곳들 중 일부는 애당초 가격이 저렴하지 않았거나, 선정 이후 슬그머니 가격을 올린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에 대해 가게 주인들은 "식자재 가격 등 물가가 오르면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 기준에 맞춰 착한 가게로 남으려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하소연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물가를 안정시킨다며 요금 인상을 억제하는 착한 가게 선정 기준에 무리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낮은 요금만 강제하기보다는 특정계층이나 세대에 대한 요금 할인 등 다른 기준으로 착한 가게를 선정, 사회적 기여 측면을 부각해야 한다는 제안이 시민단체에서 나오고 있다.
이외에도 '착한'은 조금씩 '꼬아서' 쓰이고 있다. 용례가 꽤 다양하다. 여성의 외모에도 '착한'을 붙인다. '착한 몸매' 등의 표현은 물론 여러 신체 부위 명칭 앞에다 수식어로 붙인다. 살펴보면 '예쁜' '날씬한' '아름다운' '매력적인', 그래서 바라보기에 '좋은' 등의 수식어를 모두 '착한'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는 것. 대학생 박주영(25'여) 씨는 "남성의 외모에 대해서는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사진을 보면 여성의 신체 부위를 노골적으로 두드러지게 촬영해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주로 남성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댓글을 단다. 여성 차별적이면서 외모 지상주의를 강조하는 것 같아 불쾌할 때가 적잖다"고 말했다.
'착한 남자'는 여성들이 '답답하고 매력이 없는 남자'를 돌려 말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008년 포털사이트 '야후 닷컴'은 '나이스 가이(착한 남자)가 여성에게 버림받는 이유'에 대해 발표했다. 남자가 너무 착하고, 사려 깊고, 요구를 잘 거절하지도 못하면 여성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나쁜('까칠함'이 매력적인) 남자'를 선택한다는 것.
'그 남자를 사랑해도 될까요'의 저자인 정신과 전문의 이종호 씨는 "착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배려를 많이 한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마음이나 상황, 관계를 보고 적절히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편해서 하는 '자기중심적' 배려이기 때문"이라며 "착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착한 사람이고 싶어 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바라보거나 관계하는 사람도 피곤해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착한'보다 더 나은 '나쁜'
'착한'과 '나쁜'의 사회 통념적 위치도 뒤바뀌고 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나무라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옛말. 사회가 원한다면 악도 권장하는 '권악'이 지지받고 있는 것.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났던 '악녀 신드롬'이 대표적이다. 1997년 방영된 드라마 '신데렐라'를 보고 시청자들은 "우연한 기회를 잡아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는 착한 동생(이승연)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는 나쁜 언니(황신혜)에 더 공감이 간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1996년 여성운동가 김명숙 씨는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라는 책을 내놓으며 "여성이 차별받는 사회에서 착한 여자로 칭찬받는 일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2000년 독일 작가 우테 에어하르트가 쓴 같은 제목의 책에도 "착한 여자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고 적혀 있다.
요즘 나오는 실용서적을 봐도 그렇다. '나쁜 보스가 회사를 살린다'라는 책에는 '독한' 수익 원칙을 지키며 성공한 기업 CEO들의 사례가 담겨 있다. '나쁜 아이가 세상을 바꿨어요'라는 책에는 아이들의 나쁜 짓에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가득 녹아 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탓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계발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쁜 남자 지침서'라는 책에는 '밀고 당기기'라는 매력적인 갈등 싸움을 주도하며 이성을 유혹하는 나쁜 남자가 되는 방법이 담겨 있다.
◆제대로 된 '착한' 개념 필요
'착한'이라는 수식어는 공존과 나눔의 의미를 친근하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금 꼬아서 쓰이며 오용과 남용의 의혹을 사기도 한다. 자칫 무분별해 보일 수 있는 단어 사용에 어떤 기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 허미옥 참언론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단어는 사전적 뜻 외에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다양한 해석을 하나로 묶는 공통된 맥락이 반드시 있다"며 "'착한'의 경우 공존과 나눔의 의미를 기본으로 담고 있다. 이를 크게 벗어난다면 오용과 남용의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대형마트가 '착한'을 이름 앞에 붙여 판매하는 제품들 중 일부는 소비자에게는 '착한 가격'의 혜택을 주지만 납품업체는 가격을 낮추기 위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착한'이 아니라는 얘기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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