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광주인 문익공 이원정과 칠곡 귀암고택의 나무들

용이 승천하는 모양…기둥 만들어 가지 보호

광이(廣李'광주 이씨의 별칭)의 텃밭인 왜관읍 매원(梅院)은 아름다운 향기로 뭇 사람의 사랑을 받는 매화처럼 훌륭한 인물이 많이 태어나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길지라고 한다.

1623년(인조 1년) 이곳으로 옮겨온 후 4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 6명과 왕을 지근에서 보필하는 자리인 예문관 검열(檢閱) 4명, 독립운동가 2명을 배출하는 등 가문이 번성해 조선시대에는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3대 반촌(班村)으로 불렸다고 한다.

20세기 초만 해도 400여 고택들이 즐비했으나 혹독했던 한국전쟁은 이곳도 비켜가지 않아 현재는 60여 채에 불과하고 남은 고택에도 총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천면 웃갓(上枝)이라고 한다. 통례원 좌통례(정3품)를 지낸 이극견(李克堅)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책실(冊室)로 따라온 둘째 아들 지(摯)가 지역의 토호 최하(崔河)의 사위가 되면서 처향에 자리 잡은 것이다.

광이의 튼튼한 기반은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에 의해 다져졌다. 그는 전경창, 정사철과 더불어 대구지역에 퇴계학을 보급한 제1세대의 한 분인 송담 채응린의 사위이자, 사림의 영수 정구(鄭逑)의 수제자였다.

1606년(선조 39년) 문과에 급제해 승정원 주서 등을 지내고 1610년(광해군 2년) 예문관 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했다. 이어 사관으로 실권자 정인홍(鄭仁弘)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오히려 탄핵을 받아 사퇴했다.

그 뒤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으로 사직했다.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교리를 거쳤고,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임명되었다. 이어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역임하고 1631년(인조 9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석담집'이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 성주 회연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후 광이를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한 사람은 석담의 둘째 아들 낙촌 이도장(李道長)과 손자 귀암 이원정(李元禎), 박곡 이원록(李元祿)이라고 할 수 있다.

낙촌 이도장(1603~1644) 역시 1630년(인조 8년) 문과에 급제해 사근도 찰방, 주서 등을 역임하고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고, 화의를 맺는 과정에 청나라가 척화신(斥和臣)의 명단을 요구하자 이미 알려진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 이외 더 이상 추가하지 않아 희생자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지평, 교리 등을 지내다가 건강이 좋지 못해 사직을 청하자 고향 가까운 합천군수를 제수했다. 이윽고 병석에 눕자 인조가 약과 어의를 보내 치료해 주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42세에 타계했다. 후에 홍문관, 예문관의 양관(兩館) 대제학,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특히, 남인으로는 이례적으로 형조'이조판서에 오르고 시호(諡號)를 받은 귀암 이원정(1622~1680)이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공은 낙촌의 아들로 1652년(효종 3년) 급제 후 검열, 교리를 지내고,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도승지, 대사간, 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숙종 6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대출척(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된 사건)으로 초산에 유배 가던 도중에 불려와 장살(杖殺)당했다. 1689년(숙종 15년)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편저로는 '경산지'(京山志)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속칭 돌밭(石田)의 귀암종택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양으로 자라는 기이한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도 나무지만 처진 가지가 상하지 않도록 흙과 기와를 적절히 쌓은 전통 문양의 아름다운 기둥을 만들어 보호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방문하는 날 귀암종택은 쓸고 닦기로 부산했다. 대구경북지역에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종손들의 모임이 이곳에서 열려 준비 중이라고 종손 이필주(李弼柱) 님이 귀띔해 주었다. 그렇구나. 불천위 1위만 모셔도 가문의 영광인데 석담, 귀암, 박곡, 묵헌 등 4위를 모시고 있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나무는 귀암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1671년(헌종 12년) 매원에서 이곳으로 이거해 살림집을 지으면서 배롱나무, 회화나무와 함께 심은 것이라고 했다.

그날도 배롱나무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꽃을 달았고, 회화나무는 하늘 높이 우뚝 서 있으나 향나무만은 태풍 볼라벤으로 가지가 부러지고 줄기만 겨우 살아남았다. 빨리 상처가 아물어 본래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돌아섰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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