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부산사람들이 즐겨 먹는 밀면에는 6'25전쟁 당시 1'4 후퇴로 아군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 온 이북 피란민들의 아픈 기억이 서려 있다. '회남의 귤이 회북으로 와서 탱자가 됐다'는 회남자(淮南子)의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처럼 부산밀면은 이북의 토속음식인 냉면이 남으로 와서 밀면이 된 향토 음식의 이동과 변천, 토착화 과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전쟁통에 음식 재료 구하기가 어려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북 피란민들이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부산밀면은 이미 60년 전에 향토음식이 어떻게 산업화로 나가야 할 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부산밀면의 제맛은 목구멍으로 느껴야
1년 중 겨울철 넉 달은 장사를 하지 않고도 엄청난 단골고객을 유지하는 괴짜 밀면집이 있다고 했다. 부산 서구 동대신동 영남밀면이다. 식당 문을 들어서는데 주인인 듯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어서 오이소"라고 한다.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에만 열중인 그는 손님 얼굴을 쳐다 보지도 않는다. 무뚝뚝한 게 딱 부산 스타일이다.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는 데 미리 앉아 있던 손님이 말을 건다. "잘 찾아 왔심더. 여기 밀면이 부산서 제일 맛있는 곳이라예."스테인리스 우동 그릇에 밀면 한 그릇을 말고 있던 그는 왼손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동네 사람인데 10년째 단골"이라며 싱긋 웃는다. 정작 주인은 밀면을 소개하러 왔다는 얘기에도 들은 척 만 척이다. 말 그대로 '주객전도'(主客顚倒)다. '안 그래도 손님이 밀려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홍보는 무슨 홍보냐'는 표정 같다. '에잇, 딴집으로 갈까"하는 생각이 들 즈음 "그냥 밀면 맛이나 보고 가라"며 자리에 앉힌다. 연신 밀면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어들며 흘금흘금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옆자리 그 손님이 또 웃는다. 모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데 주문한 밀면이 금세 나왔다. 5분도 채 안 걸린다.
이 집에는 밀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단다. 흔한 커피자판기도 없고 식당업의 필수인 술과 음료수도 팔지 않는다. 손님이 들고 온 술도 압수하는 집이라고 한다. "밀면을 혀끝으로 그렇게 먹으면 맛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목구멍이 비좁도록 면발을 넘겨 봐야만 제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어요." 깔짝거리는 밀면 젓가락질이 맘에 차지 않은 듯 식당 주인 주봉현(67) 씨가 곁에 와서 한마디 했다. 일행은 젓가락 가득히 면발을 집어 들고 목구멍으로 면발을 넘긴다. 다들 펠리컨처럼 목이 부푸는 모양이다. 면발의 쫄깃함이 목구멍을 씻어내는 듯하고 국물의 감칠맛 또한 입안에 가득찬다. 그제서야 "냉면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이구동성이다. 일행의 얼굴이 펴지고 만면에 웃음이 번진다.
하루 평균 찾는 손님이 1천200명. 100명만 돼도 먹고 살 만하다는 일반식당과 비교하면 입이 벌어진다. 종업원이 모두 15명이나 되지만 바빠서 눈코뜰 새 없다. 그러니 손님들도 식당 사정에 눈높이를 맞춘다. 서비스에 큰 기대를 않고 딱 5분이면 밀면 한 그릇을 비우고서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선다. 종업원들도 젓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상을 치운다.
◆한그릇 비우는 데 5분 걸려
"나는 밀면만 보면 웃음이 나와요. 그냥 좋지예." 일행과 합류한 부산 토박이 권대식(52) 씨가 밀면 한 그릇에 행복해했다. 1년 전부터 영남밀면 단골이 됐다는 그는 식당 주인의 무뚝뚝함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밀면의 노란 면발은 냉면의 메밀면과는 색깔부터 다르다. 홍고추를 갈아 만든 양념 위에 고명으로 얹은 오이채와 얇게 썬 배 한 조각, 돼지수육 편, 찐 계란 그리고 무김치 한 접시는 여느 냉면과 다를 바 없다.
한 젓가락 집어서 들어 올리니 한 그릇이 통째로 올라온다. 쫄깃한 사리는 냉면처럼 가위로 자르지 않고 그냥 먹는다. 국수 면발과는 쫄깃함이 확연히 다르다. 취향에 따라 식초와 겨자를 넣기도 한다. 고명으로 얹은 돼지고기 편육에는 풍미가 있다. 볶은 통깨를 뿌린 국물도 상큼한 맛이 마치 과일즙을 먹는 듯 하다. 입안에서부터 포만감을 주는 밀면은 목넘김이 매끄러워 식감이 특이하다. 부산 사람들이 왜 밀면에 열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소뼈를 고아 만든 육수가 곁들여 나오는 비빔밀면도 별미다. 옛날에는 땡초를 갈아 넣는 등 맵게 먹었으나 요즘은 그런 손님이 뜸하다고 한다. 너무 매우면 입안이 얼얼해서 비빔면 맛을 제대로 못 느낀다고. 밀면 한 그릇씩을 다 비우고 나서 식당 내부를 둘러보니 벽면마다 11월 1일부터는 휴업한다고 안내문을 써붙여 놨다.
겨울 넉 달을 쉬는 이유에 대해 주 씨가 설명했다."밀면은 냉면 대용으로 부산 지방 여름 음식입니다. 그걸 꼭 겨울철에도 해야 하는 건 음식점의 욕심이지 손님이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겨울철 휴업 이유가'제철 음식을 제때, 제대로 해 내기 위해서'라는 대목에선 말문이 막혔다. 겨울에라도 자신만의 시간을 갖자는 주 씨의 생각은 20년 전부터 시작됐다. 식당 문을 닫으면 부인 김종금(61) 씨와 전국 일주도 하고 시골 농장에서 나무 가지치기도 하며 지낸다고. 종업원은 어떻게 유지하냐고 묻자 휴업 기간 중엔 기본급을 지급한다고 했다. 주 씨는 "다른 데서 일하다가도 이듬해 봄에 식당 문을 열면 다들 어김없이 찾아온다"며 웃었다. 이 가게는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하루 평균 20㎏ 밀가루 10포대 정도를 쓴다. 밀가루 1포대로 밀면 100여 그릇을 낸다. 밀면은 4천500원, 곱빼기는 5천500원. 비빔밀면은 보통 5천원, 곱빼기는 6천원이다.
◆밀면라면으로 상품화된 부산밀면
옥수수가 많이 나는 평안도 사람들은 물냉면을, 감자와 고구마가 흔한 함경도 사람들은 비빔냉면을 즐겨먹는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 함정을 타고 '바람 찬' 흥남부두를 떠나 부산까지 피란 온 이북 사람들은 그해 여름 더위를 쫓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로 고향음식인 냉면을 만들었다. 전쟁 통에 메밀을 구하지 못하니 밀가루를 대용으로 쓴 것이다. 부산밀면이 동두천 부대찌개, 포천 이동갈비와 함께 6'25 남매지간이 된 내력이다. 손재주 있는 이북 피란민들은 감자가루 전분을 섞어 밀가루의 찰기를 높였다. 소다를 넣고 반죽을 만든 다음 당시 참기름 틀을 개조해 나무로 만든 국수 틀로 밀가루 반죽을 눌러 짜냈다. 지금은 유압기로 짜지만 그 당시만 해도 참기름 틀은 반죽을 고압으로 내릴 수 있어 면발을 더욱 쫀득쫀득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 낸 면발은 국수보다는 쫄깃하고 냉면보다는 덜 질긴 새로운 음식을 탄생시켰다. 평양식 냉면의 자식뻘인 부산밀면 맛의 진가는 한 그릇의 면사리를 통째로 삼켜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전라도 사람들이 '갈치구이는 가시 채 먹어야 제 맛'이라는 것과 같다. 초보 식객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방식인데 밀면을 좋아하는 부산사람들 중에는 한 젓가락으로 한 그릇을 한참에 통째로 다 비우는 이가 적지 않다고 한다.
면도 면이지만 집집마다 육수 만드는 게 비법 중의 비법. '며느리도 안 가르쳐 준다'는 육수 만드는 법을 귀띔이라도 하라고 졸랐더니 입 무거운 주 씨가'1급 영업 비밀인데 그걸 가르쳐 달라면 어떡하냐. 기본만 가르쳐 주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육수는 소뼈에다 발효 간장을 넣고 오가피, 감초 등 한약재와 양파, 마늘, 파뿌리 등을 넣고 달여낸다. 간장 반 재료 반씩 넣어 처음엔 진하게 달여내다 절반 정도 물을 넣고 희석시킨 다음 한소끔 더 끓여 육수로 쓴다. 이건 기본 육수이고, 여기에 집집마다 비전돼 오는 '잔 기술'이 더해 각양각색의 맛을 낸다고 한다. 달콤시원한 국물이 딱 맞아 떨어지면서 부산 특유의 향토음식이 됐다. 쫄깃하지만 부드럽게, '업그레이드'가 아닌 '다운그레이드'를 한 게 식당마다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만든 기본 비결인 셈이다. 부산밀면의 인기는 국내 굴지의 식품업체의 밀면라면 개발로 이어져 향토음식의 산업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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