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기적은 항상 당신 옆에 있어요

나도 살리고 싶었다. 기적이 있다면 바로 환자들의 말기 암이 완치되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매스컴에서 이런 희망적인 소식도 들려주지 않은가. 한때 우리 병동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꿈꾸었다. 나도 의사이기 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기 암 환자의 임종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비현실적인 희망은 점점 사라졌다.

때로는 이렇게 어쭙잖은 의학적 지식이 사람을 삭막하게 만든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떼를 쓰듯 의지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시간 낭비인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이제는 조금 밖에 남지 않은 환자의 삶에 집중한다. 어차피 삶이라는 것은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그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입원과 동시에 마지막 이별을 각오해야만 한다. 냉철하게 보면 기적 따위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이것이 더 현명하게 보인다.

가을이 예쁘게 다가왔을 때 달성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60대 췌장암 환자 두 분과 12살 난 뇌종양 환자 수경이까지 총출동했으니 그야말로 대이동이었다. 3대의 휠체어를 밀면서 호랑이도 보고 코끼리도 봤다. 6개월 만에 밖에 나오는 수경이는 분홍색 돌고래풍선도 한 개 샀다.

이렇게 재미있게 놀고 와서는 퇴근하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솔직히 수경이한테 미안했다. 그녀의 병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이 내 책임인 것 같아서. 아닌 것을 알면서도 서글펐다. 나는 크리스마스까지 그녀를 살릴 수 있을까? 나는 과연 그녀의 임종선언을 할 수 있을까? 호스피스의사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수경이 주치의가 되고부터 그녀를 살아내게 할 자신이 없음에 늘 괴로워했다. 행여나 그 불편한 마음을 눈치 챌까봐 감정을 꾹꾹 눌렀다. 일부러 더 밝은 척했다. 그래도 살릴 수 없음에 미치도록 미안했다. 솔직히 엄마가 내 환자가 되었을 때 보다 더 안타깝다. 나도 딸이 있는 엄마이니까.

며칠 전 신경외과에서 찍은 그녀의 머리 CT 사진에 기적은 물론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한 번 더 항암치료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대학병원에 상담하러 갔던 그녀의 엄마가 돌아왔다. 답은 안 들어봐도 벌써 알고 있었다.

그런 수경이 엄마가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말을 건네 왔다. "나는 만족해요. 이곳에 와서 수경이의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몰라요. 사실 이것이 기적이죠. 누구나 영원히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말기 암을 완치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아이의 엄마에게서 환한 웃음이 나오고, 영원한 이별의 슬픔을 알면서도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이 병동이 바로 기적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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