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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는 21세기 실크로드<제2부>]-18. 고선지 장군과 탈라스 전쟁

사라센 포로가 된 당나라 제지공, 중동'서양에 종이를 가르치다

탈라스 전쟁터 인근에 있는 포크로브카 마을의 언덕. 당시 양측 군대가 격돌했던 평원이 내려다보인다. 이슬람 묘지인 투투모스 영묘가 서 있다.
탈라스 전쟁터 인근에 있는 포크로브카 마을의 언덕. 당시 양측 군대가 격돌했던 평원이 내려다보인다. 이슬람 묘지인 투투모스 영묘가 서 있다.
포크로브카 언덕 부근의 동굴 흔적. 지금은 무너져 내린 이곳에 당나라 군대가 많은 말들을 숨겼다고 한다.
포크로브카 언덕 부근의 동굴 흔적. 지금은 무너져 내린 이곳에 당나라 군대가 많은 말들을 숨겼다고 한다.
병사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은 전사한 병사들을 한꺼번에 매장한 곳으로 보인다. 무덤에서 화살촉과 투구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은 전사한 병사들을 한꺼번에 매장한 곳으로 보인다. 무덤에서 화살촉과 투구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탈라스(잠불시의 옛 지명)에는 키르기스스탄 남쪽의 천산에서 발원한 탈라스강이 흐르고 있고 그 일대로 포크로브카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탈라스(잠불시의 옛 지명)에는 키르기스스탄 남쪽의 천산에서 발원한 탈라스강이 흐르고 있고 그 일대로 포크로브카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답사여행을 떠나면서 세계 전쟁역사상 유명한 탈라스 전쟁터의 현장을 방문지로 넣느냐 마느냐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위업을 찾아보는 여정은 가슴 벅찬 기대감을 갖게 했다. 문제는 그 전쟁터의 올바른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설명해줄 안내원도 없고 중앙아시아 관광여행 스케줄에는 그곳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무리를 해서 하루 숙박을 늘리더라도 방문하기로 했다. 얼마 전 '실크로드 문명기행'이라는 저서를 낸 정모 교수의 행선지를 따르기로 했다.

카자흐스탄의 잠불시에서 1박을 하고 키르기스스탄으로 국경을 넘기로 했다. 사실 잠불시는 과거 지명이 탈라스로 불렸으며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역도시였다. 그러나 그곳이 전쟁터는 아니었다. 국경에서 7㎞ 정도 떨어진 곳, 키르기스스탄 남쪽 천산에서 발원한 탈라스강이 흐르고 있다. 그 연안에 있는 포크로브카(pokrovka) 마을의 언덕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날씨가 쾌청해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최근 키르기스스탄 아카데미가 처음으로 병사들의 무덤을 발견했던 곳이다.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봉분은 전사한 병사들을 한꺼번에 매장한 곳으로 보인다. 마을 전경이 보이고 멀리 넓은 평원도 보인다. 산악전투에 능한 당나라로서는 강을 끼고 펼치는 수륙전에 부담을 느껴 속전속결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언덕 위에 지금은 이슬람 묘지 건물이 서 있다.

동서양의 대격전지, 그 현장에 서서 일세를 풍미한 고선지 장군을 생각한다. 그는 참으로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시대의 풍운아였다. 멸망한 고구려 유민인 부친 고사계를 따라 위구르지방에서 성장했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은 군인이 되어 전공을 쌓는 방법밖에 없었다. 청년 고선지는 부친의 후광도 없이 독자적으로 장교 직위까지 올랐으며 지장, 덕장, 용장의 기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났었다. 고선지가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서는 고선지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고구려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또 용모가 출중하고 강건한 체격을 갖췄다고 한다.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서역 원정을 성공시켜 당 태종을 기쁘게 했다. 고선지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일대까지 진출해 중국 역사상 가장 서쪽으로 뻗은 영토를 이루기도 했다. 안서절도사로 임명돼 중앙아시아를 고선지의 제국으로 호령하던 시기는 자신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이미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스타인 등도 고선지를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장군으로 한니발 장군과 비견하여 극찬하고 있다.

그 당시 신기루처럼 발흥한 이슬람 제국은 폭발적인 기세로 동진하고 있어 당시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전쟁은 마주 보고 달려드는 두 열차처럼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서기 751년 7월, 폭염 속에 대평원인 탈라스에서 고선지의 7만 군사와 연합군 30만은 5일 동안 세계사적으로 중요하고도 유명한 그 '탈라스 전투'를 벌인다. 연합군은 사라센-토번-돌궐-서역제국이 모인 것이었다. 고선지도 미리 내응하기로 약속했던 동돌궐의 카를루크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 카를루크족이 돌아섰고 당군의 배후를 쳤다. 역사적인 탈라스 전투에서 당군 7만은 겨우 수천 명만 목숨을 보존하여 돌아왔고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이는 고선지에게 있어서 첫 패전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크게 문책을 당하지 않았다. 그 후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진압군 사령관으로 나갔다가 부하의 모함을 받아 허무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후로 중국은 중앙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며 이 지역은 급속히 이슬람권으로 변모해갔다. 다만 고선지에 의한 역참과 도로의 개척으로 인해 중국과 서역, 나아가 유럽 지역과의 교류는 더욱 활성화됐다.

당나라는 상당수의 병사가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는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기에 제지술이 이슬람세계에 퍼지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종이 대신에 양가죽을 말려 두드린 양피지밖에 없었던 중동 지역에는 굉장한 신상품이 나타난 셈이었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에는 전통 제지 공장이 여러 곳 남아있다. 지난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 중국은 커다란 전자 스크린에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 종이를 만든 나라라는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탈라스 전쟁은 서양에 종이를 전달하게 된 것으로도 유명해졌다. 중동으로 간 이 종이가 다시 중세 유럽으로 갔으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만났다. 이는 대량출판으로 연결되어 종교개혁과 근대유럽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라스 전쟁의 현장에 서서 망국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던 한 고구려 유민의 후예를 생각한다. 당제국의 서역방위사령관에까지 올라 동서양 세력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고선지 장군. 그에 대한 역사학계의 재조명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병사들의 피로 물들었을 언덕 위에 지금은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바람 따라 손을 흔들고 있다.

글'사진: 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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