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지리산 피아골 단풍

조식 선생도 읊었다, 피아골 단풍 아니면 단풍 보았다 할 수 없다고…

시인 이원규가 노래했다.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절창 핏빛 단풍을 제대로 느끼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라는 말일 터이다. 오죽 아름다웠으면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조식 선생도 그리 말을 했을까.

해마다 11월이면 전남 구례군에서는 축제를 연다. '삼홍과 함께하는 오색단풍여행'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피아골단풍축제는 청명한 하늘과 형형색색의 단풍이 거울 같은 계곡물에 유영하는 단풍명소의 절경 속으로 유혹한다. 지리산 피아골로 한 번 발걸음을 옮겨보자.

지리산 피아골은 주능선 삼도봉과 노고단 사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모여드는 골짜기로, 동쪽으로 불무장등 능선, 서쪽으로 왕시루봉 능선 사이에 깊이 파여 있는 계곡이다. 지리 10경의 하나로 꼽히는 피아골의 단풍은 온 산이 붉게 타서 '산홍'이고, 단풍이 맑은 담소에 비쳐서 '수홍'이며, 그 품에 안긴 사람도 붉게 물들어 보이니 '인홍'이라고 예부터 '삼홍'의 명승지라 일컬어 왔다. 그 가운데 표고 막터에서 삼홍소 간 1㎞ 사이의 빼어난 승경이 피아골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잠룡소, 삼홍소, 통일소, 연주담, 남매폭 등 자연미 뛰어난 소와 담, 폭포가 이어져 있어 여름 계곡 산행으로도 인기가 있다.

강원도 설악에서 10월 초부터 타오른 단풍의 불길이 내처 달려와 남부로 번졌다. 굽이굽이 돌아 성삼재를 오르는 길가에도 울긋불긋 예쁘게 물든 나뭇잎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길가에는 행락객이 타고 온 자가용이 줄을 이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오르는 1시간여의 등산로에 빽빽하게 들어찬 인파가 천자만홍(千紫萬紅)을 이뤘다.

필자는 15년 전 이 코스를 등산해보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매일신문 등산안내'를 보고 친구 몇 명이 산악회에 신청했다. 피아골의 단풍이 곱다는 소문을 들었던바 잔뜩 기대에 차 있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어떻게 갈까 갈등이 심했지만,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비에 젖어 함초롬한 단풍은 곱디고운 핏빛으로 다시 피어나 여린 감성에 불을 지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산을 타고 있으니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주능선에서 구례 방향의 왕시루봉 쪽으로 운해가 낮게 깔린 산그리메가 탄성을 자아낸다. 수월한 길이 돼지령까지 이어지고 돼지평전에서 보는 조망 또한 환상적이다. 오래전에는 임걸령 삼거리에서 피아골로 하산길이 있었는데 피아골 삼거리길이 새로 난 듯하다. 여기서 임걸령, 삼도봉으로 가는 팀과 나뉜다.

우리 일행은 피아골 방향으로 내려선다. 조금 내려서면서부터 가파르고 험한 너덜길이다. 길은 험하지만, 만산홍엽으로 수채화 같은 단풍이 이어져 기분은 황홀하다. 삼거리에서 1시간여 만에 물소리 들리는 피아골 산장에 도착한다.

피아골 산장 주변에 등산객이 인산인해다. 이곳 피아골 산장은 유명한 곳이다.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전투 후 동료들의 가슴에 주렁주렁 인민훈장을 달아주고 싶다면서 상훈 수여식을 한 곳이다.

산장을 떠나 직전마을로 하산하니 끝없는 돌계단을 따라 사람들이 줄줄이 오르내린다. 어설픈 기억으로 계곡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큰 바위를 지나고 단풍 자지러지던 자리를 찾아 계곡으로 들어가 본다. 첫사랑의 느낌이 워낙 강렬해서였을까, 단풍 고운 곳이 많아서일까. 아쉽게도 15년 전에 비해 피아골 계곡의 단풍이 그 명성을 잃어가는 듯하다. 쇠줄이 늘어지도록 오고 가는 구계포교 아래 드넓은 암반 위로 흐르는 붉은 윤슬이 곱다.

피아골이란 이곳 화전민들이 곡식 종류의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하여 생긴 이름인 '피밭골'에서 유래하였다. 피아골 입구의 직전리(稷田里)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국전쟁 중 빨치산 전라남북도 총본부가 이곳에 있어, 소탕작전 시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려 있는 곳으로 피의 계곡으로 연상되어 피아골로 더 유명하다.

마을을 지나자 연곡사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절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5년(1627년)에 소요대사 태능이 복구하였다. 영조 21년(1745년) 무렵 연곡사는 왕가에 신주목(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기도 했다.

성삼재에서 등산을 시작해 노고단, 돼지령을 거쳐 피아골로 내려서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5시간 정도다. 준족의 산객이라면 지리산 제2봉 반야봉을 오른 후 피아골로 내려와도 된다. 시간은 7, 8시간 정도 소요된다. 예전에 삼도봉에서 불무장등을 거쳐서 피아골로 내려오기도 했지만 비정규 등산로로 지정되어 국립공원 직원들이 단속한다.

단풍철이면 한 번쯤 생각나는 '서리 맞은 잎새가 2월의 봄꽃보다 더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라는 시구는 당나라 두목의 시 산행(山行)의 결구이다. 불꽃처럼 찬란하게 꽃피운 단풍이 자기 소임을 다하고 다시 대지로 돌아가기 전 서둘러 단풍 숲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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