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公約(공약)인가 空約(공약)인가

불과 40일 남짓이면 새 대통령이 나온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후보가 단단히 맞붙다 보니 공약도 쏟아지고 있다. '공약은 입후보자가 어떤 일에 대해 국민에게 실행할 것을 약속하는 행위'라는 것이 사전적 의미다. 이는 이행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공약은 표다. 나중에 헛말이 되더라도 득표에 도움이 되면 공약이 된다. 꼭 필요한 정책이더라도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등판도 못한다. 표를 의식해 나온 것인 만큼 지킬 것인가 또는 지킬 수 있을 것인가의 판단은 유보된다. 이렇게 내걸린 공약들이 당선이후에 지켜질까. 상당수는 일단 당선이 되고 나면 빈 약속(空約)이 된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는 재임 기간 중 온갖 추문으로 말썽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지금도 탈세로 재판을 받고 있는 그는 이탈리아 사상 처음으로 세 번에 걸쳐 12년간 총리를 역임했다. 그의 총리 연임은 자신이 소유한 미디어 그룹 '미디어셋'에 힘입은 바 컸다. 1994년 정치 입문 당시부터 그는 미디어셋(당시 핀인베스트)을 십분 활용했다. 정적은 쳐내고 자신은 추켜세웠다. 이런 선거운동이 문제가 되자 자신이 당선되면 미디어셋을 처분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는 당선 이후 공약을 지키지는 않았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된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최근 이 미디어셋의 탈세가 족쇄가 돼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공화당 조지 부시 후보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가 맞붙은 1988년 미 대선은 증세 여부가 쟁점이었다. 앞서 8년을 집권한 레이건 정부가 남긴 막대한 재정적자를 어떻게 해소하느냐를 두고 세금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서 앞서던 듀카키스는 증세를 통한 해결을 주장했다. 부시는 공화당 전당대회서 "Read my lips, no new taxes.(나를 믿어달라. 새로운 세금은 없다)"라고 외쳤다. 부시는 이 공약으로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당선된 후 1년여 만에 공약을 뒤집었다. 세금 인상안을 발표한 것이다.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나섰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구경북 미래를 위한다며 크게 두 가지 공약을 내걸었다. 동남권 신공항을 건설해 하늘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과 낙동강 대운하를 만들어 물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지역민은 이에 호응했다. 이명박 후보는 대구에서 69%, 경북에서 73%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하지만 동남권 신공항 약속은 타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백지화됐다. 타당성이 없었더라면 애당초 약속할 일이 아니었다. 대구 경북민들은 지금도 타당성이 없다는 말을 핑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공약으로 넣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낙동강 대운하 공약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하나로 변질됐다. 당초 약속했던 물길도 열리지 못했다.

대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다시 온갖 공약으로 유권자를 유혹하고 있다. 이중에는 반값 등록금, 무상 보육 등 복지 공약이 압권이다. 복지 공약은 표와 정비례 함수다. 새누리당은 암 중풍 심장병 백혈병 등 중증질환은 100% 국가가 책임진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민주통합당은 내년부터 반값등록금 실현이라는 플래카드로 맞서고 있다.

보다 못해'건전재정 포럼' 이 정치권 대선 공약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에 나섰다. 박근혜 후보가 내놓은 복지공약을 이행하려면 연간 8조원(5년간 40조원)의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분석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공약을 이행하는 데는 이보다 3배 이상 많은 연간 24조5천억원(5년간 122조5천억원)의 추가세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후보도 천문학적 예산의 재원 조달 방안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다른 지출을 줄인다거나 조세부담률을 높여 메우겠다고 둘러댄다. 구체적인 방안은 나중에 내놓겠다고 한다.

국민들도 복지 공약에 대해 필요성을 인정하고 반기면서도 내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증세)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대선 공약을 지키자니 나라 곳간이 거덜 날 것이고 안 지키자니 공약(空約)이 된다. 그런데도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후보들은 하루가 다르게 공약을 쏟아내고 국민들은 그 공약에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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