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뮤직 토크] 동서남북(하)

어두운 시절 진보적 움직임…대중에 의해 부활

한국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라는 수식어로 마니아들에 의해 부활한 '동서남북'은 애초 '트레이스'(Trace)라는 이름으로 출발한다. 트레이스는 기타리스트이며 밴드의 음악적 리더였던 박호준과 이태열의 베이스, 김득권의 드럼이 보통의 밴드 구성을 지탱했고 이동훈의 하몬드 오르간과 김광민의 신시사이저가 확실히 차별화되는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 구분되는 것도 이동훈과 김광민이 보여 준 화려한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트레이스로 출발한 동서남북은 양병집이 운영하던 카페 '모노'에서 정기적인 무대를 가진다.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한국모던포크의 장을 열었던 양병집은 1970년대 중반부터 라이브 카페를 열고 포크 계열 가수들에게 무대를 제공했다. '들국화'의 최성원과 전인권, 김현식, 조동익 같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이곳을 거쳤다. '모노'는 이화여대 인근의 'OX'와 명동의 오비스캐빈을 벤치마킹한 신촌의 '톰스캐빈'을 거쳐 신촌역 인근에 자리했는데 라이브 녹음이 가능하도록 드럼부스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양병집은 톰스캐빈 시절부터 동서남북 멤버들의 음악적 능력에 주목했고 앨범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한다. 앨범의 제작을 끝낸 후 트레이스라는 이름도 버리고 좀 더 의미를 내포한 밴드 이름을 찾게 되는데 'N.E.W.S.'가 최종 선택된다. 새로운 음악을 전한다는 의미도 있었고 전세계의 다양한 음악을 취한다는 의미도 있어서 선택된 이 이름은 앨범이 발매될 때 '동서남북'으로 바뀌게 된다. 이유는 당시 심의기관과 방송에서 한글 이름이 아니면 활동을 할 수 없다는 단서를 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동서남북이라는 이름은 상의없이 결정된 것이어서 멤버들은 이 이름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앨범을 발매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동서남북은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무대였던 모노에서의 활동을 뒤로하고 해체를 한다. 공을 들인 앨범이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은 점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던 멤버들의 좌절감도 이유였겠다.

밴드의 해체 후 주목할만한 활동을 보인 멤버는 김광민이었다. 김광민은 '시나브로'라는 트리오를 만들어 대학가요제에 출전하는 등 일련의 활동을 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버클리 음악대학과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에서 재즈를 공부한다. 이 당시 발매된 1집 앨범 'Letter From The Earth'는 특유의 감성과 학구적 분위기로 지금까지 마니아들의 구매요청이 있을 정도며 이후 재즈 피아니스트로 또 후학을 지도하는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혹자는 동서남북의 유일한 앨범을 두고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과장된 전설'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이 통제의 대상이었던 시절 시도된 진보적 움직임이였다는 점 하나만이라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앨범이 대중에 의해 새롭게 부활했다는 점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위대한 가치일 것이다.

권오성(대중음악평론가·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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