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구절은 이별을 해 본 이들은 저마다 소리 죽여 고함지르고 싶은 함성이다. 이 구절의 속사정을 예리하게 지적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첫사랑 연인이 잘 살면 배 아프고, 못 살면 가슴 아프고, 같이 살자면 머리 아프다.' 딱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회상의 언덕 저 너머에 있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반추하는 헌시에 불과하다.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란 시는 절창이다. 그 시를 읽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수화(樹話)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명화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구절은 이별을 해 본 이들은 저마다 소리 죽여 고함지르고 싶은 함성이다. 이 구절의 속사정을 예리하게 지적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첫사랑 연인이 잘 살면 배 아프고, 못 살면 가슴 아프고, 같이 살자면 머리 아프다.' 딱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회상의 언덕 저 너머에 있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반추하는 헌시에 불과하다.

나는 서해 신안군 안좌도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못 만날 리가 없다. 기억으로 만나고, 흔적으로 만나고, 그리움으로 만날 수 있다. 화가의 생가인 안좌도 읍동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민박집을 정한 후 바닷바람이 코끝에 닿는 감촉이 너무 산뜻하여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별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골의 별들은 어두운 밤이 되어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별들은 밤마다 모여 은하를 이루고 갈 길이 바쁘면 별똥별이 되어 미끄럼을 탄다. 나는 별들 틈에서 서성대는 화가를 그렇게 만난 것이다.

화가는 뉴욕 생활에 권태가 깃들 무렵 '저녁에'란 시를 읽고 깜짝 놀란다. 잊고 있었던 고향을 찾은 것이다. 그는 큰 캔버스(172×232cm)를 끄집어내 점을 찍기 시작했다. 화가는 점 속에 바다를 그린 것이다. 화가는 하루 16시간씩 바다를 그리며 "내가 그리는 점들이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는다"고 중얼거렸다.

화가 옆에는 아내 김향안(본명 변동림)이 시녀처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천재 시인 이상의 아내였다. 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다닌 신여성 중에서도 뛰어난 재원이었다. 스무 살 때 여섯 살 많은 이상과 결혼했으나 이상이 4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상이 죽고 난 후 "결혼 4개월 동안 낮과 밤이 없이 즐긴 밀월은 월광(月光)으로 기억할 뿐"이라며 "황홀한 일생을 살다 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7년 뒤 세 딸의 아비인 화가와 재혼하면서 허물을 벗듯 이름을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바꿨다. 변동림일 때는 시인 이상에게, 김향안일 때는 화가 김환기에게 모든 걸 바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은 뮤즈(muse)였다. 장안의 사람들은 시인 뮈세와 음악가 쇼팽 등 연하의 남자만을 골라 사랑한 조르드 상드에 비견하곤 했다. 상드도 본명은 오로르 뒤팽(Aurore dupin)이었다.

김향안은 여섯 살 연상인 이상과 4개월, 네 살 위인 김환기와는 30년을 함께 살았다. 상드는 소설가였지만 김향안은 수필가, 화가, 미술평론가였다. 쇼팽과 이상은 둘 다 폐결핵 환자였다. 상드는 인후결핵을 앓고 있는 쇼팽을 발데모사 수도원으로 데리고 가 헌신적인 간호를 했다. 쇼팽은 상드를 기다리며 수도원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피아노로 받아 적어 유명한 빗방울 전주곡 15번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드는 쇼팽을 헌신짝처럼 버려 건강과 음악의 샘을 동시에 마르게 했다. 뮈세 역시 어긋난 사랑 탓에 퇴폐의 늪에 빠져 비참하게 생을 끝냈다. 쇼팽은 39세에, 뮈세는 44세에 이승을 떴으나 상드는 72세까지 살았다.

안좌도 하늘 위에서 수군거리는 별들의 중매로 화가를 만난 지가 얼마 된 것 같지 않은데 하늘이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별 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화가의 생가에 와 봤으니 그들이 누워 있는 수향산방(樹鄕山房'樹話와 鄕岸의 합성)에도 한 번 가봐야지. 뉴욕의 웨스트 체스터 묘원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덤 속에서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혼성듀엣으로 부르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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