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창작오페라 '청라언덕'

동산병원을 뒤로 돌아가면 담쟁이로 뒤덮인 고색창연한 서양식 벽돌집들이 나온다. 스위츠, 챔니스, 블레어 등의 이름을 가진 선교사 주택들이다. 여기가 바로 130여 년 전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계성학교, 신명학교, 제중원과 같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 선교 활동을 하던 요람이다. 그 아래에는 선교사들의 무덤인 '은혜정원'이 있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언덕을 담쟁이의 이름을 따서 '청라(靑蘿)언덕'이라 불렀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3'1만세운동길'이 나오고 곧장 '90계단'으로 이어진다. 원래는 '선교사길'이었지만, 3'1운동 당시 800여 명의 학생과 주민들이 이 길을 거쳐 시내로 쏟아져 들어가며 만세를 불렀다 하여 이름이 바뀌었다. 길이 끝나면 신명학교, 계산성당, 상화고택, 제일교회가 줄줄이 나온다. 이 언저리가 당시 대구의 근대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예술적 모티브가 되었다. 일찍이 시인 이상화'이장희,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작곡가 박태준'현제명 등이 바로 여기서 예술의 혼을 불살랐다. 가히 1900년대 대구의 '몽마르트르'라 부를 만한 곳이다.

이태 전에 대구중구문화원에서 이곳 청라언덕에다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웠다. '동무생각'은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 음악 교사 시절 만든 곡으로, 동료 교사였던 이은상이 글을 붙인 국민가곡이다. 계성학교 시절 박태준은 신명학교에 다니던 여학생 유인경을 사모하였으나 짝사랑에 그치고 말았다. 그 애틋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은 이은상이 즉석에서 가사를 써 주었다는 그 곡이 바로 '사우'(思友), 즉 '동무생각'이다. 그 박태준의 러브 스토리가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지난달 제10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개막 작품으로 공연된 창작 오페라 '청라언덕'이 바로 그것이다. 최현묵이 대본을 쓰고, 김성재가 작곡을 했다. 초연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청중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우선 대본이 좋았다. 표현주의적 설정을 통해 노년의 박태준과 젊은 박태준을 한 무대에 세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었다. 작곡도 좋았다. 초보자는 현장에서 처음 듣는 음악을 이해하고 감동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효과적인 레치타티보나 애국가를 비롯해서 귀에 익은 많은 삽입곡들이 그것을 커버하고 있다. 연출도 좋았고, 무대도 멋졌다.

가곡 '동무생각'이 4절까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오페라 '청라언덕' 전 4막은 가사의 사계(四季)에 맞춰 박태준의 삶과 음악, 사랑을 그리고 있다. 에피소드도 많다. 극 중에서는 유인경이 불치의 병에 걸려 박태준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면서 사랑의 아리아를 부른다. 그러나 실제 유인경은 변호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남편이 죽고 나서 다시 귀국하여 서울에 살았다는 풍문이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일까. '동무생각'이란 제목이 이데올로기 검열에 걸려 남한에서 한동안 쓰지 못했던 것도 이젠 그저 우스개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창작오페라 '청라언덕'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이 한 편의 오페라로 인해 과거 대구가 음악뿐만 아니라 거의 전 장르에 걸쳐 한국 근대예술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던 도시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현재도 대구는 한국 오페라 문화의 중심에 있다. 이는 창작 오페라의 제작 편수나 수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고자 만들어진) '불의 혼(魂)'을 비롯하여, (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무영탑' '신종' 등등 많은 작품이 전국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오페라뿐만 아니다. 뮤지컬에 있어서도 이미 대구는 '만화방 미숙이'나 '미용명가'로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투란도트'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대구가 축적한 문화 콘텐츠를 잘 활용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어느 쪽이든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재단법인화 문제를 빨리 마무리 짓고, 법인 뮤지컬 문제도 공론화해야 한다. 유럽 시장에서 브로드웨이 일색(一色)을 하루아침에 깨버린 영국의 연출가 카메론 매킨토시는 "오페라는 이태리어로, 뮤지컬은 영어로 만들어야 성공한다는 전제는 이미 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대구 문화 콘텐츠의 전망은 밝다.

노병수/달서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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