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사노라면

'사노라면'이 실린 1987년 발표된 들국화의 앨범. 노래 '사노라면'은 1966년 쟈니리가 부른 '내일은 해가 뜬다'가 원곡이다. 빅 히트곡이었지만 현실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이듬해 금지곡이 됐다. 이것을 1987년 전인권의 들국화 등이 리메이크해 발표했다. 80년대 운동권가요를 거쳐 이후 국민가요가 됐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길옥윤이다.

또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연일 대통령 후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서 환하게 웃음 짓고 서 있다. 누구는 새벽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손을 잡고, 누구는 대학생들을 만나 취업을 걱정하고, 또 누구는 중소 상인들을 만나 대기업의 횡포를 막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5년 전에도 서민들을 위해 경제를 살리겠다고 눈물을 흘리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눈물은 그를 선택했던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10월 29일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20분 만에 진화되었지만 뇌병변장애1급을 가진 열한 살의 남자와 그를 돌보던 열세 살 누나가 유독가스에 질식된 상태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형편이 어려워 떡집과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는 늘 그랬듯이 일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장애가 없었지만 동생을 위해 특수학교에 진학한 누나는 동생을 구하려다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함께 연기를 마시고 중태에 빠진 것 같다고 소방관은 전했다. 한 여성 장애인이 자신의 집에서 화재로 세상을 떠난 지 불과 사흘이 지난 때였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때도 올테지/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던가/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펴라/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사노라면 가사 1절)

2천600여 명의 해고자, 농성과 진압, 그리고 인권 침해, 이미 23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국가와 사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누구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절규와 분노에 답하지 않는다. 그저 선하디 선한 얼굴로 사람들의 손을 잡고 있는 대통령 후보들의 동정만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데도/정든 님 함께라면 행복하지 않던가/오순도순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한숨일랑 거둬지고 가슴을 좍펴라/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사노라면 2절 전문)

10월의 끝자락,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 어떤 이에게는 반갑고 기쁘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춥고 아프다. 세상은 체념하고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해가 뜨는 것이라고 소리친다. 동생의 먹을 것을 챙기고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갈아입히던 아이는 부모가 그렇게 밤 늦도록 일을 해도 결국 집이 경매에 넘어가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내일은 해가 뜬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세상을 바꾸는데 너무도 무력해서" 절필을 선언했다는 작가는 오히려 호사스럽기까지 하다. 바람이 신선한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사노라면' 노래를 듣는다. 1980년대 중반, 대학에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세상의 평등을 함께 맹세했던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였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쉰의 나이를 넘긴 어느 날 아침, 이제 그 노래는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어느 순간, 다들 그런 것이 아니냐고 변명을 만들면서 살아왔다. 젊은 날의 신념은 훈장 같은 것이라고 타협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해 왔다. 나이가 들면 그저 선하게 사는 것만이 세상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는 척 해왔다. 해서 때로는 부당함을 불편함이라고 치부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그저 또 외마디 비명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다고 역사는 늘 승자의 것이고 분노만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몫이라면 너무나 슬프다. 모두들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말해야할 시간에 이 노래를 삐딱하게 부른다고 탓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5년 뒤, 수레바퀴처럼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늘처럼 또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하는 세상이 조금이나마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전태흥 ㈜미래티엔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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