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신이 몸으로 쓴 유서 읽어요" 검안의 권일훈 소장

"현장에 늘 답이 있어요. 시신이 몸으로 쓴 유서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죠."

경찰이나 구급대원이 아닌데도 변사 사건 현장에 늘 나타나는 이가 있다. 바로 검안의다. 시신과 대면해 첫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권법의학연구소 권일훈(55'사진) 소장은 현재 대구에서 활동하는 검안의 중 유일한 법의관(법의학 전공자)이다. 그는 경북대 의대 수련의 생활 때 사법해부를 익히고 2군 법의군의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전역을 앞두고 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전문적 교육과 훈련을 받은 법의관의 필요성을 느껴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1992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으로 시작해 서'남'중부 분소장을 역임한 그는 후배들에게도 길을 열어주고자 2009년 고향인 대구에서 법의학연구소를 차렸다. 그는 "처음 대구에 왔을 때만 해도 변사 사건 현장에서 검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과학수사와 전문적인 현장 검시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말했다.

사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에 밤에도 전화벨이 한 번 울리면 바로 깬다. 그는 "대구에 온 뒤 3년 반 동안 주말에 여행은커녕 가족과 등산도 한 적이 없다"며 "사건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하고 산다"고 했다. 권 소장이 현장으로 검안을 나서는 횟수는 하루 평균 2, 3번으로 개인적인 시간을 낼 틈도 없다.

1일 오후에도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급히 준비해 현장으로 향하던 그는 "연락을 받고 나설 때면 한겨울에도 땀이 흐르고 가슴에 알람이 켜진다"고 털어놨다.

범죄와 연관이 적은 변사사건에선 검안이 끝나면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바로 옮기기 때문에 검안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그 시간 내 모든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손놀림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당시 현장에선 확인이 안 됐지만 카메라에 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는 만큼 각 신체부위를 카메라에 담았다.

외상과 치아를 살펴 수술 여부나 평소 음주'흡연 습관을 추정하기도 했다. 동공 확대 정도와 눈꺼풀 안쪽을 살피던 그는 "직장(直腸) 체온과 시반(屍斑'사체에 나타나는 붉은 반점) 등으로 사망 시각을 추정할 수 있다"며 "사후 강직 정도나 외상의 형태 등으로 사망 직전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매년 전국에서 2만5천여 건의 변사체 중 부검을 하는 경우는 5천여 구 안팎이다. 부검의가 현장 검안까지 하기는 역부족이어서 권 소장처럼 해부병리학과 법의학 전문지식을 갖춘 법의관이 변사 현장에서 시체를 검안하는 경우는 드물다.

현행법상 검안의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등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검안의는 변사 현장에서 시신의 손상 부위, 방향, 정도를 육안으로 보고 사망의 종류와 사인(死因)을 판단해 수사기관에 시체검안서를 제출한다.

권 소장은 "최초 검안은 수사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면서 "전문적인 법의학 교육을 받지 않은 검안의만으로는 현장 검시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대부분 자연사, 병사로 처리되는데 이를 의심해 수사를 돕는 것이 검안의의 역할"이라고 했다.

지역 최초의 민간 법의관이자 20년 베테랑 법의관이지만 권 소장은 여전히 할 일이 많다. 그는 "시체는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 검안의가 할 일"이라며 현장에서 시신이 남긴 미세한 흔적을 통해 의미를 읽어내는 검안이야말로 과학수사의 첫 단계"라고 자부했다.

이지현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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