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2002년 11월 3일 대구시민야구장.
전광판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의 이름이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강동우'박한이'이승엽'마해영'브리또'김한수'양준혁'진갑용'박정환. 시즌 때 팀타율(0.285), 안타(1천293개), 홈런(186개), 타점(720개), 장타율(0.473), 출루율(0.361)을 1위로 만든 장본인들로 채워진 타선은 마치 '드림팀'을 꾸린 듯했다. 선발투수 엘비라 역시 이들의 명성에 뒤지지 않은 특급 외국인 투수였다.
그러나 삼성 선수들은 관중석에서 그라운드로 쏟아지는 환호에 귀를 막았다. 늘 최고의 선수들로 라인업을 채우고 도전했던 한국시리즈서 준우승만 7번 차지, 마지막엔 늘 웃지 못했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시리즈서 9승2무28패(승률 0.243)로 저조했던 삼성에게 가을은 잔인한 계절로 기억되고 있었다.
선수들의 표정은 결연했다. '반드시 이번에는 이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문구를 머릿속에 새기며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상대는 LG. 재계 라이벌의 관계는 김응용(당시 61세)-김성근(60)이라는 두 노련미 넘치는 감독의 맞대결로도 이어지고 있었다. 한일은행 간판타자 김응용, 기업은행 에이스 김성근. 두 감독은 아마시절부터 국가대표팀에서만 한솥밥을 먹었을 뿐 그라운드에서는 줄곧 '적'이었다.
김응용 감독은 해태 시절 9차례나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에 올려놓은 '우승제조기'였지만, 김성근 감독은 8수 끝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는 '초보'였다. 김성근 감독은 1986년 당시 OB 베어스를 이끌면서 플레이오프서 삼성을 만나 2승3패로 패한 뒤 지도자생활 20년 동안 7차례나 한국시리즈 문을 두드렸지만 한 번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힘들게 잡은 기회, 김성근 감독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가을 뱀처럼 삼성을 쏘아붙일 태세로 경기장에 나섰다.
김응용 감독도 지난해 삼성 유니폼을 입고서는 가을에 웃지 못하는 삼성의 징크스를 깨지 못해 그 명성에 흠집이 난 상태였다. 명예를 건 두 감독이 펼치는 한국시리즈는 전쟁과 다를 바 없었다.
LG는 전반적으로 삼성에 뒤진다는 예상에도 특유의 '신바람 야구'로 시즌 중 삼성을 괴롭혔다. 시즌을 4위로 턱걸이한 LG였지만 준플레이오프서 현대를 2연승으로 잡고 플레이오프에 올라 KIA마저 3승2패로 물리치며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비록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오면서 체력적으로는 지쳤지만, LG는 1990년 4연승으로 가볍게 삼성을 제압한 이후 12년 만에 다시 서게 된 최고의 무대서 그 파트너가 삼성이라는 데서 묘한 자신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1차전(11월 3일'대구). 삼성은 시즌을 마친 뒤 14일 동안의 공백기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그러나 며칠 경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승부욕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1회 LG에 선취점을 내줬지만, 곧바로 이승엽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든 삼성은 5회 강동우의 2점 홈런과 6회 브리또의 솔로포를 앞세워 LG를 4대1로 물리치며 서전을 장식했다. 정규시즌 LG와의 상대전적서 평균자책점 0.39를 기록했던 엘비라는 한국시리즈 판도를 좌우할 1차전서 8⅓이닝 4피안타 1사구 1실점으로 호투하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2차전(11월 4일'대구). 1차전의 여세를 몰아붙이려던 삼성은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 방망이가 얼어붙어 버렸다. LG 만자니오와 이상훈을 상대한 삼성은 마해영의 안타가 없었다면 노히트노런의 수모를 당할 우려 속에 1대3으로 무릎을 꿇었다.
잠실로 장소를 옮긴 3차전(11월 6일). 삼성은 전병호, 배영수로 이어지는 완봉 계투와 브리또, 강동우의 맹활약 등 장단 11안타를 몰아쳐 LG를 6대0으로 꺾고 다시 분위기를 끌고 왔다. 이튿날 이어진 4차전(11월7일'잠실). 삼성은 4시간 20분에 걸친 치열한 접전 끝에 마해영의 극적인 결승타로 LG를 4대3으로 힘겹게 누르고 우승에 한 발 더 다가섰다. 3승1패. 우승까지는 단 1승만 남겼다. 삼성 권오택 홍보팀장은 "3승째를 거두자 한이 서렸던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쁨을 표현할 수 없었다.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웃음은 금기사항이었다. 부정을 탈까 봐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일부 구단 직원은 입을 막은 채 환호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벼랑 끝으로 몰린 LG는 안방에서 우승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5차전(11월 8일'잠실)에서 배수의 진을 친 LG는 두 차례의 동점을 만들면서 삼성에 8대7 승리를 거머쥐었다.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도 3승2패로 삼성이 LG보다 유리했다. 삼성 선수들은 대구 팬들이 보는 가운데 우승컵을 들어 올릴 상상을 하며 6차전이 열릴 대구행 버스에 올라탔다. 치열한 티켓 구하기 전쟁서 승리한 대구 팬들 역시 북구 고성동 밤하늘에 휘황찬란하게 쏘아 올려 질 폭죽을 기다리며 서둘러 야구장으로 향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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