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눈물과 막말 대신 꽃을 들어라

누가 파리 에펠탑이나 런던 버킹엄 궁전 앞에 가서 잔 다르크와 엘리자베스 여왕(1세) 얘기를 하며 이렇게 떠들었다고 치자.

'시집도 안 가본 여자 주제에 젖가슴만 컸지 남자보다 뭐 잘난 게 있냐.'

아마 십중팔구 파리지앵들이나 영국 신사들 지팡이에 흠씬 두들겨 맞았을지 모른다.

슬슬 네거티브로 달아오르는 한국 대선 판에 드디어 난데없는 여성 비하에다 '생식기' 운운하는 막말 시비까지 불거졌다.

선덕여왕이나 유관순 같은 시집 안 가본 분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실지 모를 '시집 안 간 여자의 정치' 논란을 생각해 보자.

여자에 대한 신화(神話)나 종교적 전통 인식 속에는 다소 여성을 낮춰 보는 남성 중심의 경향이 나타난다. 여성을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는 성서나,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지만 여자는 연꽃에 혼을 넣어 만들었다는 인도의 신화 같은 것이다. 거기다 신화 속의 인류 최초 여자는 대체로 어리석고 나쁜 짓이나 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아담에게 금단의 사과를 몰래 따 먹이는 이브나, 제우스신이 '모든 선물을 합친 여인'이란 이름을 지어준 최초의 여자 '판도라'가 금지된 선물 상자를 몰래 열어 세상에 재앙과 비극을 뿌렸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이브와 판도라, 즉 여자는 원초적으로 좀 '시근머리 없는 존재다'는 신화적 메시지를 남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여성들도 신화 속에 갇힌 시근머리 없는 존재들일까. 제우스도, 범천왕(梵天王)도 요즘같이 낡은 신화 같은 건 믿으려 하지 않는 세상과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 변화까지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우스나 범천신에게 지금 다시 신형(新型) 여성을 만들라고 하면 흙으로는 비밀 상자 안 여는 여자부터 먼저 만들고 여자 머리카락에 혼을 넣어 남자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만큼 요즘 세상은 여성 우위 시대로 바뀌고 있다. 미국 일자리의 50%는 여성 차지고 프랑스의 젊은 의사 중 58%는 여성이며 스페인은 64%다. 중국의 기업들 역시 40%는 여자가 사장이다. 카카오 톡이나 유튜브 속의 개그 속에 남성 비하의 해학과 풍자가 늘어나는 것도 모계사회로의 회귀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카리스마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회현상을 방증한다.

그런 와중에 한국 정치권의 남자들은 호방한 쟁점을 찾아내는 큰 싸움은 못하고 고작 성(性) 비교나 끄집어내는 '쫀수'를 부려 쪼잔한 남자의 이미지를 덧칠했다. 대통령은 남자만 해야 한다는 논거는 헌법, 선거법, 그 어느 법에도 없다. 전 세계 선진, 중진 국가 중 여성 통치 지도자를 뽑아놓은 나라 또한 이미 한두 군데가 아니다.

성(性) 논란 막말을 제기한 그 남자 주변엔 딸도 어머니도 없는 집안인지 알 바 없지만, 분명한 건 민주국가의 대선 판이라면 최소한 격(格) 있는 선거 판이 돼야 한다. 명색 지식층들이 이쪽저쪽 선거 진영에 끼어들어 가 '감투 한 자리 노린' 충성 발언하듯 자극적인 막말을 짖어대는 풍토는 도태돼야 한다. 지금 국민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후보의 눈물이나 저질 막말이 아닌 멋과 격이 있는 선거 판이다.

이 가을, 꽃 풍년에도 아직 대선에 나선 남자 후보들이 꽃을 든 장면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꽃을 든 남자'가 없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정치 외적 정서나 감각이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는 걸 말한다. 서울 지하역 통로에 가을 국화꽃 화분들을 들여놓자 거친 노숙자들이 소리 없이 물러났다는 소식은 경찰 곤봉의 힘보다 가녀린 꽃의 힘이 더 크다는 걸 보여준 본보기다. 이 가을 선거 판에 그런 꽃의 멋과 힘 대신 측근 막말과 눈물이나 보여주는 문'안(文'安) 후보. 시집 안 가본 여자 후보는 아직 글썽이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두 남자는 해고 노동자 가족 만나 울고, 영화관에서는 '노무현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했다. '눈물만큼 빨리 마르는 것은 없다'는 속담의 속뜻이 '눈물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임은 국민도 안다. 그걸 안다면 대권 판의 남자들이여, 눈물과 막말 대신 가을꽃을 들어라. 치열해야 살아남는 싸움이지만 품격과 멋도 풍기는 선거 판을 위하여….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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