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가을, 어느 나무의 일

나는 일봉(一峰)이라는 나지막한 산발치에 산다. 그 덕분에 늘 나무의 흔들림을 살피며 지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여름부터 유독 눈이 가는, 그래서 운동하기 위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안부를 묻게 되는 나무가 있다. 두 그루의 단풍버즘나무가 그것이다. 단풍버즘나무는 암수 꽃이 한 몸에 피지만 나는 이 두 그루의 나무를 한 쌍이라고 단정해버린다. 땅 위로 불거져 나온 뿌리가 서로 붙은 연리근(連理根). 어림잡아 수령 오십년은 족히 될 것 같다. 그 세월, 둘의 사이가 참 좋아보였다.

어느 날 두 나무 사이에 소주병과 막걸리 병이 놓여 있었다. 쯧, 쯧, 누군가 먹고 버려둔 것이라 생각, 가까이 가보았다. 그런데 잘 살펴본즉 여태 별 탈 없이 붙어있던 뿌리 짬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균열' 곁에 술병이며 알사탕 안주를 놓고 간 것이다. 나보다도 더 유심히, 그리고 살갑게 이 나무 주위를 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병뚜껑을 마지막까지 비틀어 떼어내지 않았다. 빗물이 병 속 남은 술에 섞여 들어가는 것을 염려했으리라. 너와 나,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이 나무 최초의 마음을 알아챈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그 누군가의 마음일 뿐만 아니라 나무의 화해와 화합을 바라는 나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이 저렇게 찬 술을 받쳐놓았겠다. 그 혼자 치른 거룩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저 제물로 바쳐진 술과 사탕 안주가 대략 보름 간격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러자 가을이 깊어졌고 얼마 전 첫서리가 내렸다. 붙은 나무뿌리는 제가 떨군 나뭇잎을 이불삼아 덮고 있었다. 틈이 생긴 부분에도 서로의 잎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오늘 두 나무 사이에 서서 양쪽 나무를 번갈아 안아보았다. 이상하게도 둥치 굵기가 비슷한데, 한쪽은 실한 뼈대의 남자 같고 한쪽은 내 품에 쏙 안기는 여자 같은 느낌이었다. 참 신기했다. 한참을 내 명치께로 바짝 당겨대고 있었다. 딱지가 앉은 것일까. 얼룩덜룩한 그 껍질이 상처처럼 거칠었다. 지난여름 내게 있었던 이야기들을 가만가만 들려주었다. 그러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아직 따뜻한 손바닥 모양의 나뭇잎들이 우듬지에 몰려 있었다. 여럿이 날 쓰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저들, 사람의 정겨운 손길을 애써 비켜 다니고 있었던 것 같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나는 한 발짝씩 더 다가가보지 못하고 몸을 돌려버리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석미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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