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나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김훈의 '바다의 기별' 중에서)

서랍 속의 수없이 헝클어진 파지에는 많은 낙서가 숨겨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분명 그 단어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문득 그런 문장이 보였습니다. '그리움을 사살하고 싶다.' 사살할 수 있는 그리움이라면 이미 그리움이 될 수 없는 것일 겁니다. 결국 그 파지들은 닿을 수 없었던 저편에 대한 슬픈 보고서가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차를 몰고 달려가면 이제는 10분이면 닿는 곳. 높은 산을 세 구비나 넘어야 멀리 하늘과 닿을 듯이 눈앞으로 달려오던 바다라는 이름을 지닌 곳. 어릴 때는 그곳이 그렇게 멀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바다를 곁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바다는 닿을 수 없는 곳, 품을 수 없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 불러지지 않는 것, 건널 수 없는 것, 그래서 결국 다가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김훈의 표현으로 보면 바다가 나에게는 첫사랑이었던 셈이지요.

바다를 만나고부터는 자주 바다와 만나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만난 바다는 멀리서 바라보던 바다보다 오히려 더 멀었습니다. 여전히 바다는 지독한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리움은 자라서 눈물이 되기도 했고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생채기는 자랐지만 결국 내 그리움을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죽이지 못한 그리움들이 안에서 밖으로, 또는 밖에서 안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랬습니다. 바다가 하나의 삶이라면, 난 늘 삶 곁에 주저앉아 그 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견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서성거리며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시간은 무섭게도 흘러갔습니다. 주저앉아 흘러가는 시간은 더욱 뾰족한 바늘이 돼 내 상처를 쑤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삶은 결국 닿을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의 과정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도 시간 속에서 바래집니다. 가까운 절실함이 먼 절실함의 기억을 바래지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 그럴 것입니다. 기억의 저편에 남은 먼 절실함이 지금의 절실함과 겹쳐서 더 지독한 절실함을 만든다고요. '토크콘서트 친구'를 준비하며 며칠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는 풍경이 정말 내가 꿈꾼 풍경인지 수없이 반추했습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주책없다고 할까 싶어 겉으로 한숨을 보이지도 못했습니다. 새로운 풍경이기에 두려움도 컸습니다. 하지만 소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고, 그것이 아이들의 속마음이라고 믿었습니다.

달라진 공간에서 벌써 1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바다와 만나서도 그 본질은 여전히 닿을 수 없는 무엇이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교육이란 내 꿈도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실에 매몰돼 꿈을 꿀 수도 없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꿈이 꿈의 형상만을 지니고 있지 않고, 현실이 현실의 모습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꿈과 현실은 언제나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유목하는 존재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요. 닿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라 현실이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난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꿈을 꾸고 살아갑니다. 아마 내일도 그러할 것입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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