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끝-道界마을을 찾아서] <19>청도 유호리·밀양 상동면

'유천'이라 불리며 한 마을 생활…"관공서 이름 앞에 꼭 ǫ

밀양과 청도읍, 매전면으로 갈라지는 유천교에서 바라본 동창천.
밀양과 청도읍, 매전면으로 갈라지는 유천교에서 바라본 동창천.
청도읍 유호리에 있었던 유천극장.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청도읍 유호리에 있었던 유천극장.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밀양 여수동 산 밑에 있었던 옛 유천역. 역사와 플랫폼에는 민가가 들어서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밀양 여수동 산 밑에 있었던 옛 유천역. 역사와 플랫폼에는 민가가 들어서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유호'내호'초현리와 경남 밀양시 상동면은 청도천, 동창천이 합류해 밀양강으로 흐르는 하천을 중심으로 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부선 철도,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25번 국도, 58번 국도가 만나서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예전부터 느릅나무가 우거지고 강이 있어 '유천'(楡川)이라 부르며 생활권을 같이했다. 지금은 유천이라는 지명은 사라졌지만, 유천초교, 유천우체국 등이 유천이라는 옛 지명을 상기시켜준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중학교를 가기 위해 강을 건넜고, 당시 기차역이었던 유천역을 중심으로 도 경계라는 특별한 구분 없이 넘나들었다

예전부터 이 지역은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이자 군사 요충지로 중요시됐다. 따라서 고려시대부터 역(驛)과 관(館)이 있었고, 그 밑에 원(院)이 인근지역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역이 옮겨가기도 하는 등 부분적인 부침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한밤에 동창천 하류인 이곳에서 관솔불이나 기름불로 주위를 밝히고 고기잡이하는 야경인 '유호어화'(楡湖漁火)를 청도일경으로 꼽는다고 했다. 수면에 불빛이 일렁이며 명암을 거듭하는 모습은 한 편의 그림 같았다고 기억했다.

유호리 일대 마을 뒤는 산릉이고 앞은 하천이다. 이호우, 이영도 생가와 함께 지금도 옛 극장과 정미소 등 예전 모습이 잘 보존돼 아늑한 옛날 풍광이 일품이다.

◆유천 옛 지명과 청도천, 동창천, 밀양강

청도 유호'내호리와 밀양 상동면 일부 지역은 최근까지도 유천이라는 지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주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철도 유천역을 중심으로 '유천권역'은 청도지역의 한재 일대, 사촌'지전'내리 지역과 밀양의 옥산'금산'고정리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경부선 철로는 신도마을을 지나 유호리 마을을 거쳐 밀양 여수동 쪽으로 연결되는 곡선주로였다. 그러다 철도 직선화를 위해 터널을 뚫어 직선으로 밀양 상동면으로 연결하게 됐다. 밀양 여수동 산 밑에 있는 옛 유천역의 역사와 플랫폼은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철로 직선화 이전의 역사가 현재의 상동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유천역과 지명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이 지역을 통근열차 시절의 유천으로 기억하고 있다.

주민들은 "서울에서 유천역 기차표를 구입했는데 역무원이 아무 말 없이 상동역으로 차표를 발권해줘 역이 사라지게 됐음을 알게 됐다"며 "유천이라는 지명은 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도읍 유호리와 밀양 상동면의 경계는 동창천과 밀양강을 중심으로 나뉜다. 이 지역은 청도의 서쪽 비슬산에서 시작되는 청도천(옛 한내, 자천)과 청도의 동쪽 운문산에서 내려오는 동창천(옛 운문천)이 합류해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이다.

이곳은 강이 합수하는 지형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고, 근대에는 철도와 국도가 나란히 개설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 조선시대 내륙 역로의 중요거점지역으로 밀양에서 달려온 역마나 여행자들이 청도지역과 매전지역으로 갈라지는 이곳 유천역관에 머물면서 강가에 융성했던 느릅나무의 장관을 지켜보았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유천역, 유천시장 중심 문화 전파 일번지

청도 유호리는 주변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가져와 '느릅나무 물가'를 유천, 유호로 표기한 곳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가 청도지역에 전파될 때 첫발이 닿은 곳도 유천이고, 3'1운동과 항일운동도 어느 고장 못지않게 활발했던 곳이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우체국, 경찰지서, 청도읍 출장소, 유천시장 등이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현재도 210여 가구에 400여 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의 오가는 발길이 많다 보니 유천장 상권도 일대에서는 큰 편이었다. 또 '시인의 마을'임을 알려주는 이호우'이영도 생가가 수십 년의 세월 속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어 문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유호리에 있는 유천 시장터와 옛 유천국제극장, 정미소, 유호리 폐철도부지 등은 예전 시골마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유천극장이 문을 닫기 전까지 영사기사를 했던 이지춘(64'내호리) 씨는 "당시 유천극장이 청도읍 청도극장, 중앙극장과 어깨를 견주며 영화관을 돌릴 때는 200여 명이 입장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단체관람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유천장은 청도와 밀양 상동면 일대 주민들이 모여들던 상권의 중심지로 한때는 청도장이나 밀양장보다 규모가 더 컸고, 주민들의 생활형편도 나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유천소주와 유천은어

일제강점기부터 1950, 1960년대까지만 해도 청도 유호'내리와 밀양 옥산리 구역(舊驛) 등 옛 유천 일대는 거의 수십 호에 달하는 민가에서 소주를 양조했다고 한다. 일종의 밀주단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역관(驛館)을 중심으로 주로 관청에 공급하던 전통술인 유천소주(楡川燒酒) 생산지였다. 양조기법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비밀리에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특히 밀주 단속을 피할 수 있는 경남'북 도계 경계지점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 각종 물자의 통제가 극심했을 때도 밀주 단속을 쉽게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유천소주는 빛깔이 맑아 찬물처럼 무색이며 화근 내가 나는 듯한 미묘한 향기, 도수가 높았으나 아무리 취하여도 뒤탈이 없는 순수 곡주로 유명했다"고 기억한다.

주민들은 최근까지 개조하지 않은 집 마루 밑에는 밀주단지가 아직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물이 맑았던 동창천과 밀양강 일대는 한때 은어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다. 예전에는 이 지역의 명산물로 나라에 진상됐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독점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예전 유천의 은어는 특히 맛있고 은어의 입가에 은빛 줄이 그어져 있어 은구어(銀口魚)라 불렸다"고 말했다. 글'사진 청도'노진규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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