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녹색 두리기둥-김광규

전깃줄 끊긴 채 자락길 어귀에

시멘트 기둥으로 홀로 남은 전신주

담쟁이덩굴이 엉겨 붙어

앞으로 옆으로 위로 퍼져 올라가

우뚝 솟은 녹색 두리기둥 만들어 놓았네

폐기된 전신주 꼭대기

담쟁이 더 기어 올라갈 수 없는 곳

바람과 구름을 향해

아무리 덩굴손 허공으로 뻗쳐보아도

이제는 더 감고 올라갈

기둥도 나무도 담벼락도 없네

살아있는 덩굴식물이 한 자리에

그대로 소나무처럼 머물 수 없어

제 몸의 덩굴에 엉켜 붙어

되돌아 내려오네

온갖 나무들 드높이 자라 올라가는

저 푸른 하늘에 앞길이 막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되돌아 내려오며

삶터 잘 못 잡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다운 두리기둥 만들어 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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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삶이 사람에게 삶의 방향을 가리켜 줄 수는 없어도, 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한계가 많은 구체적인 세계에 있지만, 시는 가능성의 공간인 보편적인 세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는 시인의 삶보다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시인의 삶이 경험한 담쟁이덩굴은 평범한 식물입니다. 그러나 시 속에 들어온 식물은 삶의 방향을 가리켜 주는 나침반입니다. "삶터 잘못 잡은 삶"이 살기 위해 이리저리 모색한 모든 것들이 결국 "아름다운 두리기둥"이 된다는 그런 절실한 가르침을 주는.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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