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연음식 이야기] 두부(1)

'원조' 중국도 조선 두부 알아줘…日에 전래설도

두부는 쌀 및 곡식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가장 부족한 단백질을 농축시켜 놓은 식품으로 한국음식 어디에 넣어도 좋은 담백한 맛을 가지고 있다. 생콩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두부로 만들었을 때 73% 정도가 전달된다. 그중 비지에 약 17%이고 나머지는 두부를 담그는 액에 10% 정도 녹아 있다.

두부는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져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중국의 두부 기원의 근거는 '본초강목'에 기록된 내용으로 추정하는데 B.C. 2세기경 한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기술되고 있다. 유안은 한나라 유방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한 후 불로장수(不老長壽)하는 방법을 모으던 중 학자들이 만든 두부를 맛보고 그 맛이 좋아 자신의 이름으로 두부제조법을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두부의 기원은 락의(樂毅)라는 효자가 부모가 연로하여 콩을 씹어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콩국을 만들어 드리다가 잘못하여 콩국을 소금기 있는 사발에 담았는데 옥 같은 흰색의 덩어리로 변한 것을 보고 그 후 '두부는 옥이다'고 하며 두부를 팔았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두부에 대한 언급은 고려 말 이색(李穡)의 '목은집'이다. '대사구두부래향'(大舍求豆腐來餉)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언급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원문 풀이)하였다.

'채소국 오랫동안 먹어 맛을 못 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워 주네. 이 없는 사람은 먹기 좋고 늙은 몸 보양에 더없이 알맞다.' 이 시로 미루어 보면 두부가 이미 생활 음식으로 사용하고 있음과 두부의 우수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 두부에 대한 기술들이 있다. 세종 16년(1434) '세종실록'에서 두부와 반찬을 잘 만드는 여자를 중국 궁중에 보낸 기록이 있다. 중국 궁중에서는 조선에서 온 여자가 민첩하고 음식을 규모 있게 잘 만들며 두부를 만드는 솜씨가 정교하다고 명나라 황제가 칭찬하였다 한다. 이처럼 조선 초기 우리나라 두부 제조기술은 중국보다 앞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두부 제조기술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일본의 두부는 임진왜란 중에 적의 병량(兵糧) 담당관인 강부아량병위라는 사람이 조선에서 배워 갔다고도 하며 경주 성장 박호인(朴好仁)이 잡혀가서 일본에서 두부제조를 시작한 것이 근세 일본 두부제조업의 시초라고 하기도 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중국에서 공부하고 온 스님들에 의해 주로 두부제조법이 전해졌을 거라고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두부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호칭의 변화를 장지현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한대 전후에서는 자아순, 숙유라는 이름을 썼고 당대에서 두부, 숙유, 여기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명대에는 두부, 숙유라 하였는 것으로 봐서 두부라는 호칭은 당대에서부터 시작되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에서는 중국에서 사용한 위의 명칭 외에도 포(泡)를 사용한 흔적이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기술하고 있다" 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은 포를 사용하면서 대두(大豆)를 나타내는 명칭 뒤에 포를 붙여서 두부를 여러 별칭으로 붙여 왔다. 즉 두부 및 여귀와 함께 포, 황포(黃泡), 태포(太泡), 대두포(大豆泡), 조포(造泡), 연포(軟泡) 등의 별칭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예전에는 두류(豆類)의 액즙을 응고시킨 것을 포와 부(腐)로 혼용하여 사용하였지만 현재에는 포는 녹두묵을 청포라 하는 것처럼 탄수화물을 주성분으로 하는 묵 음식에 쓰이고 있다.

두부는 특히 사찰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각 가정에서도 두부를 만들었는데 두부를 만드는 것을 취포(取泡), 혹은 조포(造泡)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왕릉에 딸린 승원에서 두부를 제조하여 궁으로 바쳤는데 이를 조포사라고 했다. 연도사(衍度寺)두부, 봉선사(奉先寺)두부처럼 절 이름을 붙인 소문난 두부가 생겨나기도 하였고 대흥사의 두부장이 유명하게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신아가 참(眞)자연음식연구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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