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역의 한바탕 즐거움이여(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宿客無念燭燼殘)/
열두 무산선녀 새벽꿈에 어른거린다(十二巫山迷曉夢)/
역루의 봄밤은 추운 줄도 몰랐구나.(驛樓春夜不知寒 )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인 묵계 강혼(姜渾'1464~1519)이 김천(도)역 속역인 부상역(扶桑驛'현재 남면 부상리)에서 쓴 시(詩)인 '부상역의 봄밤(扶桑驛春夜)'이다. 어느 봄날 밤의 정취를 아름답게 그린 한 수의 시로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종 때 대제학까지 지낸 명문장가 묵계 강혼은 경상감사로 지방을 순행하다 성주의 관기(官妓) 은대선(銀坮仙)과 정이 들었다. 이별을 앞두고 부상역까지 함께 왔지만 덮고 자야할 이불은 벌써 개령역으로 보낸 뒤라 이들은 이불도 없이 하룻밤을 보낸다. 객사에서 마지막 회포를 푼 후 강혼은 이별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 3수의 시를 남겼다. '부상역의 봄밤'은 그 중 하나로 지금도 '묵계집' 등에 실려있다.
은대선은 부상역을 지나 상주까지 강혼을 따라갔으나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다. 강혼은 조령을 넘어 도성을 향하다 성주 서생을 만나 함께 술잔을 나누던 중 은대선 생각에 즉석에서 사모하는 마음의 시와 편지를 써 서생을 통해 은대선에게 보냈다, 은대선은 이를 가지고 병풍을 만들었다. 당시 성주를 지나는 선비들이 일부러 객관에 들러 병풍을 구경하고 지났다는 얘기도 전한다. 송계 권응인(權應仁)이 강혼이 세상을 떠난 뒤 훗날 은대선을 만났는데 이미 여든이 된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다가 이제는 흰 머리카락이 흩날리네로 변했습니다"라고 강혼이 써준 시를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순애보가 전한다. 이처럼 역은 관료들이 공무수행을 하다 반드시 거쳐가는 필수코스였다, 이로 인해 역마다 흥미로운 전설과 일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김천역과 이에 속한 속역들도 예외가 아니다.
◆'택리지'의 이중환도 머물었던 김천역
성주의 답계역에서 부상역을 거치면 김천역에 닿는다. 김천역은 지금도 '찰방골'이라 불리는 김천초교와 남산공원 일대에 있었다. 김천역은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에 얽힌 일화와 사모바위 전설이 대표적이다.
이중환은 1718년 김천(도)역 찰방(종6품)에 부임한다. 그는 찰방으로 있으면서 인척 관계에 있던 목호룡(睦虎龍)에게 말을 빌려줬다가 역모죄로 몰려 큰 고초를 겪는다. 1722년(경종 2년) 신축옥사로 노론의 대신들이 유배형에 처해지자 모처럼 실권을 장악한 소론 세력은 기세를 몰아 "김일경(金一鏡)등이 목호룡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 자객을 들여 왕을 시해, 음식에 독약을 타서 왕을 독살, 경종을 폐출시키는 방법)을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해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일으킨다. 이는 당시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가 즉위한 뒤 이 역모사건이 소론의 모함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소론이 탄핵을 받게 된다. 이때 이중환이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준 것이 문제가 되어 함께 구금되었다. 당시 이중환은 역도에게 말을 제공했다는 혐의에 대해 끝까지 목호룡이 말을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해 간신히 유배형으로 감형돼 목숨만은 건졌다. 그는 1726년 절도(絶島)에 유배됐다가 이듬해 풀려났지만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로 인해 이중환은 관직을 포기하고 당쟁이 없는 살기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전국을 유랑했다. 그 결과 '택리지'라는 역작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전화위복이지만 당쟁으로 실의와 좌절을 겪은 선비 이중환이 산과 강을 찾은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에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일어난다.
◆역리들의 애환이 숨쉬는 사모바위 전설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인 사모바위 전설도 김천역과 관련이 깊다. 1718년 여이명(呂以鳴'1650~1737)이 간행한 향토지 '금릉승람'(金陵勝覽)에는 '사모(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 모양의 바위가 용두산(모암산) 끝에 있었다. 하로마을의 최씨, 이씨 가문에서 벼슬을 많이 하여 왕래하는 수레가 끊이지 않자 김천역의 역리(驛吏)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하고 남몰래 바위를 떨어뜨리니 하로마을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고 침체했다'고 적고 있다. 김천역의 역리가 용두산 사모바위를 깨트려 하로에서 과거급제자가 나오지 않자 마을 주민들이 떨어뜨린 사모 모양의 바위를 마을 입구로 옮겨갔고 지금도 마을 입구에 모셔져 있다. 조선 초기에 무수히 배출된 김천의 고관들이 고향 나들이를 하는 과정에서 김천역 역리들이 겪었던 고된 일상이 사모바위 전설을 낳게 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 때는 김천역의 역리인 한명구가 역도들에게 빼앗긴 역마 10리를 추적하여 다시 찾아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김천역이 가장 먼저 왜병에게 함락되는 수난도 겪었다. 이 외에도 김천역의 객사에는 많은 고관들이 내왕하며 김천역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했는데 그중에서도 이참(李塹)의 시가 유명하다.
'고관(古館)은 산기슭에 섰는데 위태로운 다리는 사천(沙川)에 떴네./ 땅이 기름지니 풍년이 들고 늙은 나무에는 꽃도 없구나./ 우리(郵吏)는 역마(驛馬)를 채찍하고 향풍(鄕風)은 시골노래를 즐기네./ 수수히 회포가 동하는데 계절의 길손으로 지나는구나/'
◆김천역에 속한 김천지방의 속역들
김천에는 이미 언급한 김천(도)역과 부상역을 포함해 작내역'양천역'문산역'추풍역'장곡역 등 7개 역이 있었다. 부상역(扶桑驛)은 고려시대에 설치된 역으로 남면 부상리 부상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주민들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 운동장에 몇 개의 역장 선정비와 역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1997년 학교마저 폐교돼 유물을 찾을 길이 없고 말구리. 당말리 등 말과 관련된 지명만 일부 남아있다. 부상역은 옛부터 성주와 대구, 선산, 상주, 김천, 인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관계로 많은 관리들이 내왕이 잦았다. 이곳은 역마가 달리던 길인 국도 4호선이 새롭게 확'포장되고 2008년에는 중부내륙속도로가 들어서 교통요충지로 여전히 이름값을 하고 있다.
옛 지례현에는 작내역(作乃驛)과 장곡역(長谷驛)이 있었다. 작내역은 구성면 작내리 속칭 평지마을에 있었다. 암행어사가 김천지방 순시 때 작내역의 역졸들을 대동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전한다. 장곡역은 대덕면 관기리 장곡마을에 있다. 고려시대 이 마을이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으로 불리면서 역도 처음에는 두의곡역(頭衣谷驛)이라 하다가 뒤에 장곡역으로 고쳤다.
추풍역(秋風驛)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에 있었던 역이다. 고려시대에는 어모현(御侮縣) 관할이었는데 조선 초기인 1416년 어모현과 김산현이 통합해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김산군 관할로 들어왔다. 충청도와 경계에 위치한 추풍역은 김천역에서 40리 거리에 있었다. 문산역(文山驛)은 조선시대에 신설된 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김산신역(金山新驛)으로 처음 등장한다. 지금의 문당동 문산마을에 있던 역으로 통상 30리마다 1개소의 역이 설치되는 관례를 깨고 김천역으로부터 8리에 불과한 문산에 역을 설치한다. 이는 당시 인근 배천마을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경렴서원(景濂堂)을 열자 전국의 선비들이 앞다투어 김천을 찾게 되고 이를 감당할 수 없어 김천역에서 부득이 문산역을 신설하게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세에 따라 역이 생겨나고 또 길이 비껴가기도 한 모양이다. 지금의 문산마을은 문산역의 역리들이 정착해 형성한 마을이라 한다. 양천역(陽川驛)은 개령면 양천리 마을회관 일대에 있었던 역이다. 조선 세종 때 개설되었으며 부상역과 함께 개령현에 딸린 2개의 역중 하나이다. 양천역은 김천역으로부터 20리 거리에 있다. 역 앞에는 동부리와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있는데 지금도 역마고개라 불린다.
글'박용우 특임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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