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국민'을 함부로 들먹이지 말라

'국민'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들먹였던 정치인을 꼽으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집권하자마자 스스로 국민이란 단어를 끼워 넣어 '국민의 정부'라고도 불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도 따져보면 국민 중심의 정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민주니 자유 같은 그럴듯한 단어들을 들먹인 사람들치고 말 그대로 민주적이고 깨끗하고 자유의 가치를 지켜준 경우는 드물었다. 없거나 거꾸로 간 경우가 더 많았다.

자유와 민주를 내세운 자유당, 민주공화당은 독재로 망했고 '국민'을 내건 국민의 정부, 문민정부도 끝장에 가서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자식'측근들의 부정부패로 썩었었다. 적어도 짧은 근대 정치사(史)만을 놓고 봐도 자유니, 민주, 국민을 들먹인 정치 권력자치고 말 따로 통치 따로 엇박자를 짚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셈이다.

낡은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안철수 대선 후보가 요즘 유난히 '국민'을 들먹이고 있다. 출마도 '국민이 불러내서' 했고 '무소속 후보' 대신 '국민 후보'란 이름도 갖다 붙였다. 단일화는 '국민연대'로 가야 한다면서도 '국민연대'가 뭐냐고 물으면 '국민이 보여줄 것'이라는 모호한 말로 둘러댔다. 그는 출마 선언문에서 '국민'이란 말을 22번이나 썼다. 그동안 11번의 강연이나 연설에서 '국민'을 들먹인 건 무려 212번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정치인이 정치 연설이든 강연에서든 국민을 염두에 두고 일편단심 국민, 국민을 주문처럼 외우고 강조하는 것을 굳이 시비 걸듯이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을 대선 판의 주신(主神)처럼 모시는 안 후보가 '국민' 앞에 내놓은 공약들을 보면 과연 국민을 받드는 국민 후보인지 표밭을 떠받드는 후보인지 쉽게 감이 잡히질 않는다.

국민을 망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기아', 즉 경제적 궁핍이다. 나라 살림이 거덜나면 국민들 뒤주 속도 별수 없이 거덜난다. 쌀농사는 조금만 짓고 우르르 다 떡 만들어 갈라 먹으면 결국 다 같이 쪽박 찬다는 얘기다.

안 후보는 어제 무려 850가지의 공약을 쏟아냈다. 복지 부문 공약만 해도 어림잡아 100조 원 정도 넘나들 것으로 추정된다. 문재인 후보의 160조 원보다는 낮을 것 같지만 장난 아닌 수치다.

경제 전문가들은 100조 원 단위의 오색 무지개를 다 띄워 주려면 부가세 인상 등 증세 조치가 필연적이라고 우려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가뜩이나 장사가 안 돼 연간 1만여 개가 넘는 자영 업소들이 개업, 폐업을 반복하고 있다는 상황에 서민'영세 계층만 졸려 죽는 사태가 온다는 비판이다. 대기업과 소수 가진 계층에 대한 증세도 그가 말하는 국민 중 어느 국민을 졸라매 어느 국민의 배를 불리겠다는 것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이미 1천600조 원 가까운 나라 빚(총체적)을 안은 우리 살림으로 볼 때 더 이상 대책 없는 공약을 남발하며 '국민'만 들먹인다고 해서 해법이 저절로 나올 수 없다. 적어도 소득 2만 달러 국가, 고교생 85%가 대학에 진학하는 깨어 있는 나라의 국민이라면 그 정도 간단한 셈법은 할 줄 안다.

재탕 삼탕 공약을 베껴 내도 알라딘의 등잔에서 펑! 하고 거인이 나타나는 그림책 속 기적을 믿을 수준의 국민은 없다. 불과 40%대의 여론조사 지지도를 모은 젊은 정치 초보생이 국민, 국민 하며 국민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리는 건 60%대의 비(非)지지자 '국민' 눈에는 김칫국 타령으로 비칠 수 있다. 국민을 말하려면 국민에게 당해도 보고 업혀도 보고 산전수전, 대중 심리의 변화무쌍함과 무서움을 한두 번이라도 겪어보고 들먹여야 한다.

어느 정치인은 안'문 두 후보가 "국민을 '홍어 뭣'같이 본다"고 욕했다더라만 국민을 잘못 보고 쉽게 보면 손에 쥔 권력까지도 내놓게 되는 게 정치판이다.

국민이란 이름은 희망콘서트장의 기타 반주곡에 나오는 노래 가사가 아니다. 11번의 강의에 212번을 주문(呪文)처럼 국민을 외워대고 재탕 섞인 공약을 850가지나 내놓는 안 후보는 아무래도 국민을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다.

선거 전쟁에서 선전(善戰)은 하되 국민이란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는 말라. 국민, 국민 들먹이던 사람들일수록 더 추하게 사라지더라는 진리를 안 후보보다 더 뼈저리게, 더 일찌감치 겪어본 국민이 눈을 뜨고 있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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