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자정 가까이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 도착했다. 전기가 부족한 국가여서인지 시가지는 캄캄했고 숙소에 들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바로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일출을 보려고 베란다로 나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시가지 건너편에 펼쳐진 하얀 산들의 파노라마,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만년설이 경이로웠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도 적절히 배치되어 도시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는 이 나라는 이같이 보석처럼 아름다운 관광자원들을 간직하고 있다.
비슈케크에서는 시가지 어디에서도 만년설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천산산맥의 지맥 알라트산이 보인다. 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하여 보기 좋게 나무들을 잘 가꾸어 도시 전체가 공원처럼 느껴진다. 인구 85만 명의 수도지만 시장에 가보면 우리와 닮은 얼굴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서쪽에 위치하며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1세기 무렵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6세기에는 돌궐, 7세기에는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8세기에는 다시 위구르의 침략을 받았으나 키르기스스탄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고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아래에 있었다.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도시의 모습이 바뀌었다. 도로는 바둑판처럼 형성되었고 동일한 모습의 5층 건물이 줄지어 섰다. 근래 들어 혁명으로 독립국가가 된 이후에야 도심에는 근대적인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다.
도시에서 조금만 근교로 나오면 유목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 양떼를 모는 목동들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는 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인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의 나라'라는 뜻이다. 산악국이라 불릴 정도로 국토의 40%가 해발 3,000m를 넘는다.
비슈케크로부터 불과 30㎞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나 도시와 완전히 별천지인 알라알차 국립자연공원을 방문했다. 천산산맥의 지류인 알라트 산에서 흘러나오는 알라알차 강을 따라 형성된 협곡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면적은 약 1만9천400㏊로 공원입구가 벌써 해발 1,300m이다. 길은 강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곡 속으로 올라간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변화하는 산의 자태에 감탄하면서 걸어가면 자연공원관리사무소가 나온다. 등산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숙박도 가능하다. 이곳이 해발 2,000m 지점이며 자동차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잘 자란 노간주나무들을 보면서 30분 정도를 오르면 왼쪽 능선 뒤편에 은빛으로 빛나는 설산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때마침 신비스러운 운무가 피어올라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코발트 빛 하늘과 새하얀 산봉우리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걷기 편한 신발로도 충분하다. 한 시간 정도 본격적인 등산을 하면 빙하지대에 도착하고 직접 만년설을 만져 볼 수 있다고 한다. 웅장해 보이지만 험한 루트가 예상된다. 전문 등산인들은 가이드와 함께 트레킹과 해발 4,692m 카로나봉의 등반에 나서는 출발점이다. 수십 개의 산책로와 트레킹 코스가 있다. 말을 빌려 타고 일정한 코스를 돌아보는 일정도 있다. 적토마처럼 잘생긴 말들이 그늘에서 고객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협곡의 건너편에는 예쁜 색상으로 지붕을 장식한 산장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휴양지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는 별칭을 가질 만도 하다. 앞쪽에 흐르는 하천에는 만년설 녹은 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닌 물 좋고 공기 좋은 이곳에서 다만 사흘이라도 책도 읽고 산책하며 푹 쉰다면 속세의 풍진을 씻을 수 있으려나. 이미 100년 전부터 인근에는 '이식아타'라는 온천 휴양지도 개발되어 있다. 노천온천에서 바라보는 빙하와 설산의 모습은 어떠할까. 휴양소 부지 내에 있는 암벽에는 8세기에 조성된 마애약사여래상이 발견되어 이곳도 실크로드 문물교류와 함께 불교 전파의 길목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은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서역원정을 단행하며 지났던 길이었고 현장 스님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여행객들은 중국에서 국경도시인 카슈카르를 지나 힘들게 토루갓 패스를 통과하면 푸른 초원이 펼쳐지며 탁 트인 풍경에 안심을 한다. 그리고 설산을 보며 절경에 감탄한다. 이제 동'서양을 이어주는 물자교류와 소통의 실크로드에도 휴양과 심신의 치유를 겸할 수 있는 중간지역이 관심을 끌기 시작하고 있다. 청정 산악국가 키르기스스탄이 21세기 실크로드의 길목에서 힐링 붐과 함께 대자연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글'사진: 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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