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사기 교양 강의/한자오치/돌베개

불굴의 의지로 삶을 일깨우는 최고의 역사서 '사기'

# '사기'의 인물과 사건의 진실 밝히고 시사점 제시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과장되었다? 모든 서적을 불사른 것으로 알려진 '분서'는 사실이 아니며, 진나라에 불리한 기록이 많았던 동쪽 여섯 제후국의 역사책만을 불살랐을 뿐이다. 일반 사회과학 서적이나 제자백가 서적은 민간인 소지를 금했을 뿐이지 국가 도서관에 소장된 것은 손대지 않았다. 이유는 우민 정책으로 국민의 두뇌를 단순하게 만들어 편히 통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단, 의약이나 농경과 같은 자연과학 서적은 모두 자유롭게 유통되도록 허용했다.

그러므로 진시황제가 분서를 강행했던 목적은 자유로운 사상의 억압과 우민 정책의 시행이었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듯 문화 말살이 아니다. '갱유'도 장생불사 약을 구해주겠다며 진시황제를 농락한 도사들 460명을 악질로 판정하고, 함양 교외의 산골짜기에 생매장한 것이다. 공자와 맹자의 학설을 추종했던 일반 유생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40년간 사마천과 '사기'를 연구하여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한자오치의 '사기 교양 강의'를 읽었다. 이 책은 방대하여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막막한 독자들이 '사기'를 깊고 정확하게 읽도록 도와주는 안내서다. 저자는 '사기'에서 그간 우리가 오해했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혀주기도 하고, 중요 인물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하며, 현대와 접목해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기도 한다.

이사는 훗날 진시황제가 된 진왕을 도와 중국을 통일했으며, 통일 후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고 시행한 인물이다. 그는 진 제국의 안정적인 통치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지원과 협조로 진시황제는 청사에 길이 남을 공적을 세우게 된다. 이사는 신하로서 최고 지위인 승상이 되었고 부귀의 극치에 이르렀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즉위한 지 37년 되던 해에 동쪽 연안으로 순시를 나갔다가 중병이 들어 죽는다. 죽기 전에 진시황제는 조서를 내려, 북방 전선에 있던 큰아들 부소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황위를 계승하도록 명하지만, 환관 조고는 조서를 왜곡하고 둘째 아들 호해를 왕위에 앉힌다. 진시황제의 원로 공신인 이사가 이 음모에 가담함으로써 진나라는 멸망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 신생제국 진나라가 파탄 나면서, 결국 이사는 저잣거리에서 허리를 잘려 죽는다. 처형이 임박한 이사가 그리워했던 것은 누렁이를 끌고 토끼를 사냥하는 평민의 생활이었다던가.

사마천은 '이사 열전'에서 이사의 성공부터 실패까지 전 과정을 기록하면서 득실에 연연하는 이사의 심리를 생동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 묘사를 통해 한 인간이 사리사욕에 빠지면서 극히 이기적으로 변하고 취약해지는 비열한 본성을 비판했다. 일개 평민이 개인적인 득실에 연연해 이기적이 되면 그 해악은 그저 본인 한 사람에 국한되겠지만, 직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자가 개인적인 득실에 연연하면 그 해악은 본인만이 아닌 국가와 민족에 엄청난 피해를 안기게 되는 것이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은 영웅 항우는 왜 유방에게 패했을까? 사마천은 유방과 항우를 대비시켜 기록할 때마다 유방보다는 항우를 동정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럼에도 유방에게는 장점이 많았는데, 특히 인재를 발탁하고 이용하는 능력은 거의 천부적이었다. 전쟁의 신 한신도 유방 앞에만 오면 철부지 어린이로 전락하여 유방의 손아귀에 놀아났을 정도이다. 유방은 또한 충고를 잘 받아들여 자신의 착오를 인정해 고친다거나 기존의 잘못된 명령을 취소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다.

유방은 고집을 피우다가 군사적으로 크게 손실을 보았을 때도 애초 반대 의견을 냈던 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정도로 통이 크고 아량이 있었다. '사기'에는 고상한 인격과 인품으로 이상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거나 시대를 앞서 간 인물들, 도의나 원칙을 견지하다가 희생된 인물 등 비극적인 인물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의기소침하거나 절망에 빠져 고통스러울 때 무한한 힘과 용기와 자신감을 안겨준다.

신남희(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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