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얼만데요?" "깎아 주이소" "안 돼요. 밑보고야 팔 수 없지예."
15일 오후, 옛날 김천(도)역 인근 황금동이 왁자지껄 들썩댄다. 5일마다 열리는 김천 장날이다. 입동을 지난 때문인지 요즘 김천 전통시장은 김장시장이 형성돼 더욱 떠들썩하다. 고추를 담은 포대가 줄줄이 쌓여있고 무, 배추, 마늘 등 김장재료가 길 가를 점령했다. 운동회도 아닌데 도로 위에 만국기를 걸고 손님을 맞는다. 국밥을 말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촌로들의 모습이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5일장으로 대표되는 전통시장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할인마트 등에 밀려 쇠락한지 오래되었지만 모처럼 김장시장을 맞은 김천장은 활기가 넘친다. 김천장은 예전 '짐전장'으로 불리며 영화를 누렸다. 지금은 황금시장으로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편리한 교통으로 전국 5대 시장이 된 김천장
김천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장이다. 짐전장으로 불린 김천장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중엽까지 평양과 개성, 강경, 대구와 더불어 전국 5대시장에 포함될 만큼 성대했다.
교통의 발달은 김천을 근대 상업도시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천은 찰방역인 김천역을 중심으로 역에 종사하는 인력과 주변에 형성된 원(院)과 주막, 역과 내왕객들에게 물품을 조달하는 상인 등이 역 인근에 정착하면서 마을로 발전한 전형적인 역촌(驛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역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교통과 통신, 물자 운송 등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추기관이었고 인마(人馬)의 이합집산이 빈번하고 물자 운송이 용이한 지점에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역을 중심으로 문물의 집산이 활발했다. 그 주변 요지에 시장이 개설되어 상거래가 번성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역 주변에 큰 시장이 개설, 교역의 중심지로 발달된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겪으면서 유민(流民)들의 수가 급증하게 된다. 이들은 호구지책으로 보부상과 같은 형태의 초기 상인으로 상거래에 뛰어들었다. 또 화폐경제의 발달로 상거래가 집약된 형태인 시장이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김천의 편리한 접근성과 역을 통한 도로 여건의 편리성은 조선 후기 들어 김천장을 삼도시장(三道市場)의 위치에 올려놨다. 교통의 이점이 큰 장터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특히 김천은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중앙 접경에 위치한 덕분에 각 도의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삼도의 특산물이 집결하는 '백화점' 같은 장의 특성을 보였다.
이후 김천장은 거미줄같이 역과 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갖춰지면서 더욱 성장한다. 전국의 상인들이 김천으로 몰려들면서 1800년대 말 남대문 밖에서는 강경, 대구와 함께 전국 3대시장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김천장의 주요 거래 물품은 방짜유기와 우피(牛皮), 삼도의 농'특산물, 말린 생선 등이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함께 김천의 상권에 매료된 일본인들이 대거 김천에 정착하게 된다. 이 또한 김천이 가진 지리적 장점과 우월한 교통망을 주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김천장 못지않게 김천우시장도 전국 최대 규모로 형성돼 번성기를 누렸으며 도축업과 우피 산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천에 조선피혁㈜이 설립돼 김기진이라는 우피 거상이 출연하기도 했다.
면단위의 시장들도 번성했다. 무주 경계지역에서 활발했던 지례장과 선산 접경의 감문 배시내장이 오랫동안 큰 장을 유지했다. 시장을 통한 상업의 번성은 인구의 증가와 세수의 확대로 이어져 김천이 1949년 경북에서 포항과 함께 가장 먼저 시로 승격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감천을 통한 뱃길도 교통로로 한몫
김천 시가지를 흐르는 감천(甘川)은 김천의 젖줄이다. 봉화산에서 발원한 감천은 황악산에서 흘러내린 직지천 두물머리와 김천역 인근 속구미에서 합류한다. 다시 동쪽으로 60여㎞를 흘러내려 구미시 선산읍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낙동강 중류부에서는 가장 큰 하천이다.
황악산 아래 김천은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으로 교통'물류의 요충지였다. 이는 낙동강으로부터 영남내륙의 서편으로 접근이 가능한 감천이라는 큰 하천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감천은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 겨울 갈수기를 제외하고는 연중 나룻배의 통행이 가능했고, 수로를 이용해 거창'무주'추풍령 일대로의 화물 운송이 활발했다.
초기 김천장은 감천변 모래밭에 난전 형태로 형성됐다. 남해안에서 운송된 어류와 소금, 해산물 등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선산으로부터 작은 배에 옮겨져 감천을 따라 올라온 뒤 김천장이 열리는 감천변에 정박했다. 김천장의 주요 거래 물품 중 해산물의 비율이 높은 이유다. 감천 백사장에서 염장되거나 말려져 1차 가공을 거친 해산물들은 상주와 영동, 무주, 거창 등지로 공급됐다. 해산물의 영남내륙지방 보급소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감천유역 일대의 마을지명에서 '배다리', '배시내' 라는 지명이 다수 보이는 데서도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자이자 지리경제학의 원조로 추앙받는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감천의 효용성을 높게 평가했다.
"김산(金山)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의 물이 합해져 감천(甘川)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접어든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知禮), 김산(金山), 개령(開寧)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의 이로움을 누린다. 논밭이 아주 기름져서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 하는 까닭에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이중환은 1717년(숙종 43년) 김천(도)역 찰방으로 재임하다 사화에 연루돼 관직을 접고 30년간 전국을 유랑한다. 그는 조선의 풍토와 지리, 산물, 교통을 집대성한 인물로 물산교역을 중시한 실학자답게 김천의 교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또 김산, 지례, 개령 지방을 관통해 흐르며 낙동강과 연결되는 감천이 가진 수로(水路)의 효용성과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새로운 교통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는 김천
교통의 편리성으로 인해 일찍이 시장이 번성하여 상업도시로서 발전을 구가한 김천은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각광을 받는다. 철도가 들어서면서 역마의 역할은 수명을 다하게 되지만 철도가 이 역활을 대신했다. 1931년에는 김천과 경북을 잇는 경북선이 개통돼 영남내륙 교통도시로 거듭난다. 1966년에는 김천'삼천포를 연결하는 김삼선이 기공식을 가졌으나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후 1950년대 이후에는 경제 개발에 힘입어 전국 도로망이 정비된다. 역마는 아예 사라지고 철도 위주에서 도로와 차량 통행 위주로 획기적으로 바뀐다. 그동안 김천이 가진 교통의 이점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특히 19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으며 김천을 거쳐 가는 통과도시로 전락하게 했다. 인근의 상주와 선산, 구미, 거창, 무주 등을 아우르던 중심도시의 자리를 산업화'정보화시대에 눈을 맞춘 구미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김천은 KTX시대를 맞아 사통팔달 도시로 새로운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등 12개 공공기관이 들어서는 김천 혁신도시가 중요한 맥이다. 김천과 진주를 잇는 총연장 184㎞의 남부내륙철도가 2016년부터 공사에 들어간다. 또 김천과 전주를 연결하는 동서횡단철도사업도 정부의 추가 검토 대상 사업으로 선정되는 등 '십자축 철도 교통망' 구축 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혁신도시 건설과 더불어 김천이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바야흐로 한반도 복판에 자리한 황악산 자락의 김천이 새로운 물류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된다.
글'박용우 특임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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