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또 하나의 문화, 화장

"흑장미 꽃잎 두 개 따서 입술에 붙여보았더니, 뽀얀 피부에 흑장미색 입술이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지. 그때 내 나이 여덟 살, 그때부터 지금까지 입술 화장엔 흑장미색 립스틱만 고집하지."

많은 사람에게 첫 경험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 화장에 대한 첫 경험은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남아 생의 긴 여정 속에서 잔잔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7080세대들에 있어 화장은 성인 여자의 표상이었다. 어릴 적 거울 앞에서 언니 혹은 엄마의 립스틱을 발라보고는 어른이 되고픈 욕망으로 어른들의 몸짓과 표정을 흉내 내곤 했었다. 방과 후 시내 백화점 화장실이나 학교 앞 분식점은 '나이 들고픈' 중'고교 학생들의 화장대가 되었었다.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책가방 속에서 꺼낸 엄마 화장품을 이용하여 다소 과장되게 화장을 했다. 화장은 나이트클럽과 나이 제한 영화관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성인식과도 같았다. 실상 어설프게 화장한 모습은 학생, 어린 나이와 같은 그들의 정체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으며, 결코 예쁘게 보이지도 않았다.

90세대들에게 있어 화장의 시작은 엄마나 언니의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TV나 영상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스타들의 '최신 유행 스타일 흉내 내기'로부터 시작된다. 보통사람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스타일, 그렇게 하고 다니기에는 용기가 필요한 스타일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했으며, 그러한 파격적인 스타일을 한 친구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용기와 과감성에 높은 점수를 주기도 했다. 이 세대들에게 있어 화장은 자신이 보고 즐기는 이미지를 스스로 투영시켜보는 적극적인 놀이문화의 하나였다.

지극히 모범생인 경우는 사회적으로 화장이 허용되는 대학생이 된 후에야 화장을 시작했다. 대학생으로서 화장은 약간의 파운데이션과 립글로스 정도의 가벼운 화장으로 학생으로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화장은 사회인 여성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의무의 하나이기도 했으며,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여대생에게 요구되는 자질 중의 하나였다.

요즘 10대들에게 있어 화장은 더 이상 '성인의 표상'이거나 '나이 들어 보임'을 위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굳이 어른스럽게 보이거나 성인 여성으로 보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려보이면 어려보일수록 더욱더 높은 점수의 평가를 받게 되는 사회 문화 속에 살기 때문이다. 이들의 화장이 예전의 것처럼 더 이상 촌스럽거나 과장되지도 않다. 수도 없이 등장하는 또래 걸그룹 스타들의 이미지들과 최신 트렌드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훨씬 세련된 감각의 화장을 스스로 할 줄 안다. 이제는 어려보이면서도 섹시해 보이는 화장에 몰두한다. 원래 '어리다' 또는 '귀엽다'는 이미지와 '섹시하다'는 이미지는 서로 상충되는 이미지이다. 섹시함과 귀여움~ 이 두 가지를 한 얼굴에 녹여내는 고도의 화장 기술은 우리나라가 단연 세계 최고다. K팝과 한류 열풍에 힘입어 이러한 고도의 화장 문화 또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뷰티 산업이 경쟁력 있는 산업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경쟁 사회에서 외모는 또 하나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기준이 되고 보상이 따른다. 고학력의 노동 인력이 넘치는 우리 사회에서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 여성의 경우에도 예쁘고 섹시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미인박명'이나 '마음이 고와야'와 같은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우울한 자녀들에게도 더 이상 영어, 수학 공부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능력, 세련된 화장 테크닉이 사회에서 더욱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어릴 적 '나이 들고픈' 욕망으로 화장을 했던 7080세대들도 이제는 '동안 얼굴' 만들기에 애쓰고 있고 나아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나이 없음'을 위해 의료 기술의 도움까지 받고 있다. 이를 통해 젊음과 생기, 삶의 활력을 찾는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과연 나의 화장이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인지를.

이현주/대구보건대학 교수·뷰티코디네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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