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윤심덕 사의 찬미

사진=1920년대 신여성으로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윤심덕과 목포 군수 출신의 아버지를 둔 갑부집 유부남인 김우진과의 사랑 얘기를 담은 영화
사진=1920년대 신여성으로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윤심덕과 목포 군수 출신의 아버지를 둔 갑부집 유부남인 김우진과의 사랑 얘기를 담은 영화 '사의 찬미' 포스터. 윤심덕 역은 장미희가 맡았다.

지난 금요일 저녁 약속 장소를 향하던 택시가 막 신천대로를 벗어날 무렵, 어둠이 내려앉은 신천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 탓이리라. 주말의 교통 체증에 마치 이력이라도 난 듯이 운전기사는 벌써 이십여 분 넘게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러니까 야당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란 거 아입니까? 갑자기 와 투표시간 연장은 하자꼬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거는 무조건 돈이 드는데 나라 살림은 생각도 안 한다는 것 아닌교." 방금까지 그는 누구든 다 똑같다는 생각에 군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그래도 경상도는 여당을 찍어야 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간단하잖아요. 선배! 왜 우리의 권리를 두고 애걸복걸해야 되죠." 며칠 전 후배가 하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택시기사에게는 그 어떤 논리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물을 끼얹을 수 없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더구나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이십여 분을 달려온 승객의 정체를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연이어 말했다. "좌파 정권 10년 동안 북한에 퍼주다가 볼일 다 봤제." 약속 장소까지 몇 번의 신호가 더 남았을까.

"전 그 사람들의 막무가내가 싫어서 택시를 안 타요." 택시를 타지 않는다는 후배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저것 좀 보소. 여자들이 이 시간에 밥은 안 하고 할 일없이 다니니까 길이 이렇게 막히지." 그 기사는 아마도 여당의 후보가 여자라는 점을 잠시 잊은 듯이 보였다. 아니면 그에게 그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된 대통령의 가련한 딸일지도 몰랐다. 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운전사는 푸른 신호를 기다리며 승객이 자신의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난듯 라디오를 틀었다.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 1845~1902.)가 작곡한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곡은 왈츠였지만 유난히 슬프게 들렸다. 그것은 윤심덕이 그 곡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눈물로 된 이 세상이/나 죽으면 고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너 찾는 것 허무/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눈물로 된 이 세상이/나 죽으면 고만일까/행복 찾는 인생들아/너 찾는 것 허무(사의 찬미 전문)

"선배! 전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희망이 없잖아요." 얼마 전 자식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고 돈 버는 기계가 되어버렸노라고 한탄하던 또 다른 후배의 절규가 아프게 떠올랐다. 그는 보수에게는 넌더리를, 진보에게는 절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좌절은 젊은 날,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대학 시절, 강도와 사기, 그리고 세상의 나쁜 놈들을 어떻게 민중이라고 그들을 위해 싸울 수 있냐고 물었다. 현상과 본질의 문제라는 선배들의 설명에 그들을 인간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고 고개를 내저었던 그였다. 30여 년의 시간이 흘러 그는 다시 절망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나쁜 놈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고 우리가 싸웠던 것들의 가치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택시가 약속 장소에 거의 다다를 무렵, 낡은 유모차에 폐지를 실은 할머니가 횡단보도를 힘겹게 건너고 있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폐지가 떨어져 내렸고 이미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붉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뒤의 차량 경적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택시기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얼핏 폐지에 묶인 가난 같은 것 속에서 연인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이 떠올랐다. 홀로 떠난다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남겨진 것들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세상은.

㈜ 미래티앤시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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