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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사 주최 '2012 전국 다문화가족 생활체험 수기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대상을 받은 김성복 씨 가족
대상을 받은 김성복 씨 가족

◆ 대상작

제목: '한국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김성복/중국, 한국 거주 12년/충남 보령시 명천동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작은아이가 학교 준비물을 사러 가자고 성화를 부려서 함께 나섰다. 학교운동장을 지나는데 새색시 입술처럼 물들어가는 단풍잎들이 반겨준다. 매일 차 타고 다니면서 쫓기며 살다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벌써 가을이구나! 한국에서 맞는 12번째.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온 것이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두 딸의 엄마가 되고 사랑하는 가족이 생겼다. 대화 상대조차 없던 나에게 가족, 친구가 있어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나는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러다 운좋게도 베이징에 있는 대학을 다녔다. 대학에서 일본어와 한국어 공부를 한 덕분에 졸업하고 바로 한국기업에 취직하게 되었다.

연수생으로 한국에 나왔던 나는 남편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두 딸을 낳고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와 그 어렵다는 국제결혼의 까다로운 절차를 다 밟아가면서 사랑으로 이룬 가정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아니, 결혼이라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들은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으셨다. 남편이 직장인 대출 1천만원을 받아서 13평짜리 집에서 가전제품과 장롱은 모두 할부로 들여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빨래는 매일 손으로 해야 했고, 냉장고를 놓을 자리조차 없어 베란다에 놓았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산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잠깐이었다. 남편이 출근하면 하루 종일 대화할 사람도,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었다. 남편에게 집착하는 나도 힘들고, 남편도 차츰차츰 지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의 집착이 심해져 갈수록 남편의 마음은 점점 멀리멀리 도망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누구와 상의할 사람도 하소연 할 사람도 없었다. 중국에 계시는 부모님들에게 잘 살 것이라고 큰소리 치면서 와서는 이게 무슨꼴이냐고, 가슴이 막 터지는 것 같았다.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까? 자상한 중국 남자 다시 만나서 결혼할까? 머리 속에는 백여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날 누가 중국어학원에서 강사를 해보라는 제의를 해왔다. 나는 급여가 얼마인지,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대답했다. 그렇게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받는 급여보다 쓰고 다니는 돈이 더 많았지만 마음은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였다. 나를 기다리는 곳이 있다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찼다.

그렇게 차츰 나의 생활도 안정되고 있던 차에 남편의 월급이 차압되면서 시댁과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시부모님들은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이런 일이 생겼다'며 원망을 하셨다. 오래 전에 시누이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다. 가전제품의 할부도 끝나지 않았고, 게다가 임신 중이였다. 남편은 현금서비스를 받아 돌려막기를 했지만 결국 우리는 보금자리를 내주고 월셋방으로 보따리를 쌌다.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임신한 몸으로 중국어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힘든 것도 몰랐다. 오로지 빨리 빚을 갚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시댁 식구들이 원수같았고 세상의 어려움이 나에게만 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손이 터져 피가 나도록 전단지를 돌렸다. 그러다가 아이가 유산되고 말았다. 눈물만 났다. 몸보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과외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일에만 매달렸지만 한국 엄마들은 후진국에서 온 나에게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보다 엄마들을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심지어 어떤 어머니는 과외비를 던져주기까지 했고 몇달 배우고는 과외비 안 주는 분도 계셨고 시작하기 전에는 한 명이라고 하고 온 가족이 함께 배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중국어를 배운다면 어디든 누구라도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내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을 하니 시부모님들도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 큰 아이를 출산하자 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신다고 했다. 우리 지은(큰딸)이가 태어난 지 21일.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새벽수업(기업체), 학교 방과 후, 학원, 과외,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수업을 했다. 정말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들을 해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견하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빚에 쪼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집도 사고 학원 할 자그마한 상가도 마련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늘 즐거웠다. 한국은 노력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나라라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한국에 오길 너무 잘 한 것 같아'라고 밖에 나가 막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엄마, 왜 울어."

작은 아이가 와서 나를 쳐다본다.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

옛날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는데 아이한테 거짓말을 했다.

"엄마, 내가 호~ 해줄까?"

갑자기 코가 찡하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아프면 걱정해주는 우리 가족! 나를 걱정해주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요즘 나는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초등학교에서, 저녁에는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친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눈코 뜰 사이도 없이 바빠서 아이들한테는 늘 미안하지만 일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일은 또 다른 나의 삶이고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건강한 두 딸, 자상한 남편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이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행복은 누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지켜야함을 잘 알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니 하오"를 외친다.

◆ 심사평

대상 김성복 씨의 '한국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는 난관 극복기이자 한국 정착기이다.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 때문에 맨손으로 시작한 신혼 생활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아나갈 무렵 남편의 빚보증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시댁과의 불화를 겪는다. 마침내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한국은 노력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발견한 인간승리를 적었다. 한국어의 구사와 표현 수준 또한 좋았다.

우수상 안충수 군의 '박쥐? 배트맨!'은 한국인을 엄마로, 일본인을 아버지로 태어난 필자가 한'일 축구전이나, 독도 문제 등 한'일 간의 미묘한 신경전에서 자신의 삶을 박쥐 같은 인생으로 원망했다. 마술을 취미로 하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준 담임 교사 덕분에 한'일 간에 오작교를 놓을 까마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소리 소문 없이 도와주고, 부조리한 사회악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멋진 영웅, 배트맨으로 재탄생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다문화가정이 어두운 동굴이 아니라 꿈을 키우는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우수상 류월 씨의 '해바라기꽃'에서 작가는 중국에서는 꿈에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황사이지만, 지금은 고향으로부터의 모래바람이 속삭임처럼 부드럽게 느껴지고 기다려진다고 했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 처가 앞마당에 가득 피어있던 해바라기를 잊지 않고 아내를 위해 이곳 고구마밭 한가운데 해바라기를 심어놓은 사려깊은 남편, '비가 내리면 계속해서 비만 내리더냐, 그래도 맑은 날이 더 많지 않더냐'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시어머니, 시동생의 이혼으로 조카를 돌봐주는 따뜻한 심성의 며느리. 훈훈한 가족애로 삶의 갈등을 덮어나가는 인간 드라마로 문장 표현이 돋보이는 수기다.

심사위원장 장호병 (수필가, 계간 문장 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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