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억지로 맛을 낸 술입니다. 조미료 등 첨가물을 넣어 속성으로 만든 술이죠. 마시면 숙취, 배탈 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맛을 낸 술입니다. 사실 술은 사람이 아닌 미생물이 만들죠. 여기에 사람의 지극한 정성이 더해져 맛은 물론 향도 좋은 술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때 술을 '빚는다'고 표현합니다. 이후 10년, 50년, 100년 동안 점점 '익어가면서' 술은 가치를 더합니다."
술과 인생은 닮았다. 스스로 길을 빚어나가면서 시간을 더해 점점 익어가는 인생. 술의 '숙성'(熟成)은 같은 한자어를 앞뒤로 바꿨을 뿐인 사람의 '성숙'(成熟)과 통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를 위해 지난 수십 년을 보냈고, 남은 수십 년도 기약했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술박사' 정헌배(57)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를 13일 대구에서 만났다.
◆술과 음악
술 얘기 전에 음악 얘기가 먼저 나왔다. 그는 중1 때부터 고2 때까지 트럼펫을 불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 집안 형편 등의 이유로 꿈을 접었다. 지금은 가끔 지인들 앞에 연주자로 선다.
그런데 그가 즐기는 음악이 트럼펫 말고 하나 더 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자신의 술 방앗간인 '정헌배 전통주 연구소'의 지하 숙성고에 있는 술 옹기 2천여 통을 상대로 대금이며 가야금 등 우리 전통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좋은 술을 만들려면 음악이 꼭 필요합니다. 당분이 들어있는 과실이나 곡류 등 원료, 효모, 물 그리고 적절한 온도가 술을 만드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요건입니다. 이들을 서양에서는 오크(참나무) 통에, 우리나라에서는 옹기 항아리에 넣어 숙성시킵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잘 어우러지지 않아요. 음악이 필요합니다. 서양에서는 오크통을 한데 모아놓고 피아노 소품 등 잔잔한 음악을 들려줍니다. 우리 전통주는 잔잔한 전통 소리와 궁합이 맞죠."
◆술 공부하러 와인의 나라 프랑스로
그는 음악가의 꿈을 접고 영남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그의 머릿속은 '수출보국'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무엇이 부가가치 높은 수출품이 될 수 있을까? 국내 농산물을 가공해 활용할 수는 없을까?" 생각 끝에 한 글자 단어를 빚어냈다. '술'이었다.
"경영학적 시각에서 봤을 때 술은 굉장히 매력적인 재화입니다. 단순한 제조 공정, 농산물 가공품 중 가장 뛰어난 저장성, 시간을 더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부가가치. 술이 지닌 미래가치가 30년 전 제 눈에 '확' 들어왔죠. 지금 외국에서는 술을 오랫동안 저장해 부가가치를 얻는 '와인펀드'가 뜨고 있습니다."
그는 술을 공부하기 위해 '와인'의 나라, 프랑스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유학자금이 없었다. 비행기 삯이라도 벌자며 1년간 직장 생활을 했다. 그때 술박사 인생의 첫 번째 은인을 만났다. 직장이었던 유원건설의 고 최효석 회장이었다.
"직장을 그만둘 때 '전통주를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품으로 만들기 위해 술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떠나겠다'고 했죠. 신입사원이 겁도 없이 말입니다. 그랬더니 최 회장은 저에게 파리 주재원 명목으로 월급을 주며 '공부하는데 보태 쓰라'고 했습니다. 비행기 삯은 있었지만 공부하며 버틸 돈은 막막했던 저에게 큰 행운이었죠."
◆술박사가 되어 고국으로
술박사 인생의 두 번째 은인은 프랑스 현지에서 만났다. '술 마케팅' 박사 과정을 마치러 파리9대학에 가서 만난 르비앙 교수였다. 르비앙 교수가 며칠간 연구실을 비울 때마다 '눈치코치'를 발휘해 스크랩 자료를 정리해주고, 늘 우리나라 특유의 예의범절로 대했더니 금방 애제자가 될 수 있었단다. 그렇게 술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프랑스로 떠난 지 5년 만인 29세에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기반이다.
"브랜디와 위스키는 어떻게 세계적인 술이 됐고, 럼과 보드카는 왜 동네 술에 머물렀는지를 박사 논문 주제로 다뤘어요. 실은 럼과 보드카가 더 많이 소비됩니다. 하지만 생산국을 세계에 알리고 수출에도 기여하는 '명품주'는 브랜디와 위스키에요. 그 핵심은 제대로 된 원료를 사용하고, 술에 등급을 부여하고, 브랜드 명칭도 심혈을 기울여 짓는 것이었습니다. 기본 사항이죠. 하지만 현지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겨 차마 분석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낯선 동양의 나라에서 온 젊은이가 유럽의 술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자 논문 심사위원들은 깜짝 놀랐다. 그를 알아본 파리상공회의소 측은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을 떠날 때와 같은 대답을 하고 1985년 귀국했다. "술을 계속 연구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는 어떻게?
"가수 '싸이'가 우리 대중음악의 세계화에 성공했습니다. 동아시아 정도까지만 퍼지던 기존 한류와 달리 세계적 코드에 부합하는 한류를 일으켰습니다. 우리 전통주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싸이는 기본을 지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선호하는 문화적 코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싸이는 단순하고, 재미있고, 따라 하기 쉬운, 팝의 기본을 제대로 지켰죠." 전통주의 세계화도 마찬가지란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기본이 '족보있는 원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술의 원료로 사용할 쌀의 원산지, 경작 방법 및 시기가 확인 및 관리돼야 한다는 것. 그래야 고유한 술맛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지역마다 개성 있는 술맛이 브랜드 가치를 얻을 수 있단다. 그러면서 정체성을 얻는 '족보있는 술'은 브랜디, 위스키 등 다른 세계적인 명품주의 특징이기도 하다.
"기본을 지킨 싸이는 단순 댄스 가수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술로 치면 '숙성' 단계를 제대로 거친 겁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경제적 가치도 엄청나죠.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 과정에서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세계적인 명품 전통주 탄생을 꿈꾸며
그는 현재 우리 전통 인삼주를 세계화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술 방앗간에서 우리나라 특산품인 인삼과 안성지역의 쌀을 사용해 술을 빚어내고 있다. 술맛은 물론 제조 공정과 상품화 전반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그러면서 주류제조 특허 4개와 숙성 옹기독 실용신안 등 다수의 지적재산권도 보유하게 됐다. 술 방앗간 일대에 19만8천여m²의 부지를 확보해 '세계명주마을'이라는 우리 술 테마파크 사업도 추진 중이다. 모두 우리 전통주를 세계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한창 어우러지고 있는 노력들이다.
"저도 있는 힘껏 노력 중입니다만 다른 누구라도 우리 술을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드는데 힘썼으면 좋겠어요. 반만년 역사와 함께 반만년 술의 역사도 지닌 우리 민족에게 세계적인 명주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100년 묵은 술과 아름다운 술 문화를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해야 합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사진'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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