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with라이온즈열정의30년] '기적' 같은 우승에 1만여 명 흥겨운 가을밤

<45> 한국시리즈 첫 우승 (하) 우승 뒷이야기

마해영의 역전 홈런으로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1985년 통합우승 제외)을 알리는 축포를 달구벌 밤하늘에 쏘아 올린 2002년 11월 10일. 대구는 잠들지 못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려왔던 우승에 삼성 선수들과 프런트는 물론 대구시민들까지 감격에 겨워 서로 끌어안으며 "최강 삼성"을 목청껏 외쳤다.

우승은 끝내기 홈런처럼 갑작스러웠기에 감동은 벅찼다. 그날 삼성이 5대9로 재역전을 허용하면서 대구시민야구장은 침묵과 허탈에 휩싸였다. 8회말 삼성이 1점을 따라붙으며 3점차로 점수가 좁혀졌지만, 아웃카운트 3개를 남긴 마지막 공격에서 삼성이 승부를 뒤집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발 디딜 틈 없었던 관중석은 8회가 끝나자 드문드문 빈 자리가 생겼고, 구단 직원들도 "오늘은 어렵다"며 최종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날 시민야구장을 찾았던 김준혁(51) 씨는 "김응용 감독의 투수 운영을 질타하며 야구장을 빠져나왔다. 화가 났기도 했지만 삼성 선수들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기 싫어 8회말이 끝나자 자리를 떴다. 나처럼 일찍 야구장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광장에 꽤 많았고,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끼리 패인을 꼽으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때 야구장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소리가 엄청나게 컸고 길게 이어졌다. 홈런을 쳤구나 싶어 서둘러 야구장으로 향했다. 3루 쪽 계단을 오르는 데 이번에는 더 큰 함성이 귀를 때렸다. 놀라 뛰어가니 마해영이 그라운드를 돌고 있었다. 이승엽과 마해영의 홈런 장면을 보지 못해 억울했지만 다른 관중과 함께 펄쩍펄쩍 뛰면서 우승의 감동을 즐겼고, 집에 와서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다시 봤다. 정말로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삼성구단 직원 중에서도 역사적인 순간을 제 눈으로 직접 본 이는 드물었다. 이승엽의 동점 홈런이 터지자 삼성구단 직원들은 혹시 모를 우승 준비를 하느라 전시상황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한 직원은 몇 번이나 준비했지만 터뜨리지 못했던 샴페인을 가지러 갔고, 또 한 직원은 우승 티셔츠와 모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폭죽이 설치된 곳으로 향한 직원도 있었고, 우승 축하 진행순서를 적은 종이를 찾는 직원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미처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우승 축포가 터지고 말았다. 당시 마케팅'관리팀장이었던 송삼봉 현 단장은 "유상진 2군 버스기사와 함께 우승 통천을 가지러 갔는데 마해영이 홈런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승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잡을 데도 없는 80kg의 통천을 둘이서 들고 오는데 무거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우승의 기쁨과 서둘러야 한다는 마음이 고통을 잊게 한 마취제였고, 엄청난 힘을 쏟아나게 한 마약 같았다"고 말했다.

그날의 우승이 갑작스러웠던 건 잔치판을 벌인 한국야구위원회(KBO)도 마찬가지였다. 삼성구단 한 관계자는 "그날 삼성이 우승하면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전달하려 KBO 총재가 야구장에 와 있었다. 그러나 경기 흐름이 LG 쪽으로 기울자 자리를 떴다. 9회말 삼성이 역전을 시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삼성이 우승했다는 연락을 받은 총재가 서둘러 차를 돌려 급히 야구장으로 다시 와야 했으니 그날 대구엔 분명히 기적이 일어났던 게 분명하다"고 했다.

긴박하고 분주했던 경기장 밖 일의 일이 있은 뒤 그라운드엔 우승축하 대형 통천이 펼쳐지고 1만여 명의 관중과 선수들은 흥겨운 가을밤을 보냈다. 그날 시민야구장에서의 축제는 야구가 끝난 뒤 1시간가량이나 TV로 생중계됐다. 7전8기 끝에 이뤄낸 삼성의 우승은 주요 뉴스로 다뤄졌고, 매일신문을 비롯한 신문들은 마침내 한을 풀어낸 삼성의 기적 같은 우승을 대서특필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김재하 단장(현 대구FC사장)은 딸의 함이 들어오는 날이라 부득이하게 인터불고 호텔에서 열린 우승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삼성의 주요 인사들은 21년 만에 이뤄낸 쾌거를 되새기느라 그날 밤 쉬이 잠들이 못했다.

삼성그룹은 우승의 기쁨에 계획하지 않았던 전국일간지 광고를 사상 처음으로 게재하는 등 지갑을 열었고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일제히 할인행사를 열어 우승을 기념했다.

23일엔 대구체육관에서 시민 감사 대축제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조해녕 대구시장과 이의근 경북도지사는 삼성의 우승을 시'도민 화합으로 상생시키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라운드서 멋진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은 목청껏 응원해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삼성구단은 통상 10년이나 30년, 50년 단위로 발간하는 연감을 21년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냈으니 그간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으로선 길이길이 간직하고픈 값진 우승이었다.

우승을 확정 짓는 홈런을 터뜨린 마해영은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고, 동점 홈런의 주인공 이승엽은 그해 시즌 MVP에 올랐다. 진갑용(포수)'이승엽(1루수)'김한수(3루수)'브리또(유격수)'마해영(지명타자) 등 삼성은 5명이 골든글러브를 받아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던 1987년(김시진'투수, 이만수'포수, 김성래'2루수, 류중일'유격수, 장효조'외야수) 이후 15년 만에 골든글러브 최다배출의 보너스도 챙겼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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