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담합 권하는 사회

1921년 '개벽'(開闢)에 발표된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는 일제강점기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 새벽 2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는가?"라고 묻는다. 남편은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했다오!"라고 푸념하지만 아내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편은 "아아, 답답해!"를 연발하며 붙드는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고 또다시 밖으로 나간다. 아내는 멀어져가는 남편을 보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며 절망을 되씹는다.

요즘 경제계에서는 아내의 탄식 같은 말이 자주 들린다. 바로 "그 몹쓸 사회가 왜 담합을 권하는고!"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다. 담합은 기업들이 서로 짜고 물건값이나 생산량 등을 조정해 다른 경쟁 업체를 따돌리거나 부당한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공정거래법에 규정된 대표적인 불법행위다.

이달 4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국민주택채권 수익률을 담합한 혐의로 20개 증권사에 과징금을 부과하고 6개 증권사는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하지만 담합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처벌 수위를 놓고 '솜방망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20개 증권사는 6년여 동안 수익률을 담합해 수천억원의 부당 이득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과징금은 192억3천30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과징금보다 담합으로 챙긴 이득이 훨씬 많으니 담합을 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이번 조치로 '리니언시'(자신신고자 감면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리니언시는 담합 사실을 자신 신고하는 경우 과징금을 감면해 주는 제도다. 담합 조사를 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진신고를 하면 과징금 100%, 2순위는 50%, 3순위는 30%를 감면받을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리니언시를 적용해 밀약 사실을 스스로 신고한 2개 증권사에 대해서는 과징금을 감면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담합을 근절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담합 기업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그동안 리니언시는 담합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논란의 중심이 됐다. 제도를 악용해 과징금은 회피하고 부당 이득만 챙기는 '먹튀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성완종 선진통일당 의원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5년간 리니언시를 통해 감면받은 과징금은 총 부과 총액의 38%인 1조원에 달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담합의 특성상 내부 고발자가 없으면 적발하기 어렵다. 리니언시 도입 후 담합 적발이 크게 늘어난 것에 비춰보면 꼭 필요한 제도"라는 입장이다.

이를 두고 공정거래위원회가 리니언시의 최대 수혜자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리니언시 덕분에 공정거래위원회가 '손 안 대고 코 풀고 있다'는 것. 단속이 어렵다고 기업의 신고에 의존하는 것은 경제 검찰의 책무를 소홀히 한 행위라는 비난도 들린다.

처벌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으면 제도의 실효성은 떨어진다. 부당 이득에 비해 과징금이 턱없이 적으면 담합 유혹을 뿌리 칠 수 없다. 또 담합을 한 뒤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면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담합을 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인식까지 심어 줄 수 있다. 이런 분위기가 담합을 권하고 부추기는 사회를 만든다. 담합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다. 담합 근절 대책이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하는지 진지하게 곱씹어 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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