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서 책 선물을 받았다. 난로에 얹어놓은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바람결에 뒹구는 창 밖 낙엽에 눈길 주어가며 평화로운 오후의 책 읽기를 시작했다. 달필가로 알려진 저자의 글은 여전히 매끄러웠다. 그 와중에 오자가 눈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눈으로 교정부호를 붙이고 다시 읽기를 90페이지 쯤, 또 몇 개의 오자를 발견했다. 동병상련일까. 이 실수로 인해 깊은 밤 괴로움으로 잠 못 이루었을, 어쩌면 이미 매서운 대가를 치렀을지도 모를 편집자의 마음이 느껴져 책 읽기를 멈추고 판권을 넘겨보았다. 초판인가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3쇄 본이었다.
저자는 물론이고 편집자에게도 오자는 치명적이다. 첫 직장이었던 잡지사에서의 일이다. 외부 필자 원고의 심각한 오자를 담당기자가 놓친 채 책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팀원 전원이 자라목이 되어 필자에게 사죄하던 그날의 사건은 이후에도 내 잠자리를 괴롭히는 기억이 되었다. 글자들이 마구 움직이다가 제멋대로 다른 페이지에 옮겨 붙는 악몽이 마감 때마다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트라우마는 출판 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해 연말, 책자 5만 부의 인쇄를 끝내고 제본 감리를 하던 중이었다. 그해 마지막 작업이었고,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쫑파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는데 유독 한 글자에 눈이 갔다. 분명 '리'로 읽혀야 할 글자였건만 그건 누가 보아도 점이 하나 더 붙은 '라'였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이어지던 불길한 전율. 알고 보니 인쇄판에 티끌이 들어갔는데 그 많은 여백을 다 두고 하필이면 절묘하게 그 지점에 붙은 것이었다.
클라이언트도 난색이었다. 밤낮 잊고 돌던 인쇄기도 멈춘 적막한 인쇄소에서 산처럼 쌓인 책을 한 권씩 펼치며 그 티끌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직원들, 직원들의 친구, 후배, 그 후배들의 친구들까지 동원되어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며 티끌이 만든 야속한 오자를 긁어낸 우리는 죄 그 위에 쓰러졌다. 책 만들기는 쉬워졌고, 책 읽히기는 점점 더 어렵다 한다. 그래도 나에게는 책 만들기는 여전히 어려운 작업이다. 원고가 책이 되는 과정에는 아직도 사람 손이 가야 할 일이 더 많기에.
뒤 벨레(Du Bellay, 1550)가 그의 시집 '올리브' 증보판에 부친 긴 서문의 재미있는 구절을 옮겨본다.
"독자여, 그대가 오식(誤植)을 발견하더라도 나를 비난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일이외다. 나는 그 일을 남의 성의에 맡겼으니까. 게다가 교정이란 대단히 힘든 작업이라, 특히 새 작품의 경우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 아르고스의 안력으로도 오식을 다 찾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나 윤 희 출판편집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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