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가 자주 쓰던 말이다. 밭에 바지개를 지고 거름을 뿌리던 오줄없는 이가 남들이 장 보러 간다니까 자신도 돈 한 푼 없이 따라나서는 걸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로부터 이런 욕을 부지기수로 얻어먹은 경험이 있어 성장하면서 '재거름 지고 장에 따라 가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여러 번 다짐한 바 있다.
분위기라는 게 있다. 살다 보면 자신은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할 형편이 되지 않는데도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따라가는 수가 왕왕 있다. 지나고 보면 그 일이 잘된 경우도 있고 때로는 분위기에 빠져버린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무슨 결정을 할 땐 냉철한 이성적 판단에 의존해야지 기분에 들뜬 감성이 지배하는 꼭두각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가을이 절정으로 치달을 무렵 도반들에게서 "오랜만에 요리 같은 요리를 먹어보자"는 연락이 왔다. 어느 누가 제의를 하면 거절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불문율이다. 행선지는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성주군 금수면 성주 댐 안의 무지개가든(054-932-5233)으로 닭요리 전문집이었다. 우린 서로 믿고 의지한 지가 꽤 오래되어 어떤 음식을 먹는지조차 물어보지 않는다. 그동안 음식을 두고 실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싱글 기장을 비롯하여 세 부부 등 일곱 사람이 오랜만에 호반의 맑은 공기 속에 풀어놓아졌다. 댐 좌우 산의 나무들은 부끄럼도 없이 발가벗은 몸으로 노랗고 붉은 색깔의 의상으로 갈아입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지난여름 태풍 탓으로 물길이 바뀐 물줄기는 붉게 물드는 풍경을 흐르는 물살 거울에 비춰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랬더니 부인들은 우리 속의 닭보다 더 수선스러워졌고 얼굴엔 행복감이 넘쳐 났다.
수탉 두 마리를 주문했다. 익숙한 솜씨의 주인이 철사 고리로 다리를 낚아채니 놀라는 것은 수탉의 총애를 받던 암탉들이었다. 졸지에 잡혀가는 지아비를 본 암탉들은 철망에 머리를 처박기도 하고 날갯짓을 하며 이성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인간 세상에는 지아비 지어미를 헌신짝처럼 버리기도 하는데 우리 속의 닭 가족에게도 이렇게 배울 게 있구나. 가정법원에 이혼 신청을 한 이들의 체험 필수 코스로 이곳 닭장을 둘러보게 하면 어떨까.
잡혀온 수탉들은 근육질의 몸매와 늘씬한 긴 다리가 멋있었다. 훈련만 잘 시키면 싸움판에 나서 한도 닭(싸움 닭)과 겨뤄도 별반 손색이 없을 듯하다. 저 정도의 미남 아니 미계(美鷄)이니 암탉들이 울고불고 앙탈을 부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냄비에 담겨 상위에 오른 도리탕도 맛이 그만이었다. 약간 질긴 감이 있긴 한데 졸깃졸깃한 게 씹을수록 깊은맛이 있었다. 무릇 모든 육물 고기는 연하게 느껴지는 식감보다 수소의 등심처럼 약간 '쭐깃쭐깃'한 게 한결 맛이 좋다.
점심을 먹고 나니 "집 나온 김에 무주 쪽으로 가서 1박하면 어떠냐"는 제의가 나왔다. 하나같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도반 중 한 쌍은 "버너 코펠은 물론 쌀과 라면까지 모든 것이 차 안에 준비되어 있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재거름 지고 장에 가는 격으로 준비 없는 여행을 그냥 떠나기로 했다. 모두들 아내가 옆에 있으니 "다녀 오겠수다" 하며 인사하면서 미안해 할 필요도 없이 흐르는 시냇물에 소나무껍질 배를 띄운 것처럼 물결 따라 흔들리기로 했다.
이런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너무 멋있는 여행이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었다. 무주의 펜션도 비수기여서 방 잡기가 아주 쉬웠다. 우리는 통상 펜션을 정할 땐 첫째 가격, 둘째 시설과 청결상태, 셋째 방에서 내다보이는 경치를 꼽는다. 성경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지만 우리의 제일은 가격이다. 가격이 착해야 우리의 사랑을 받는다.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의 펜션포유(063-322-5151)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했다. 이곳 동네 전체가 단풍으로 치장하고 있었고 계곡의 흐르는 물도 가을 단풍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을 해먹은 후 커피 한잔을 마시는 여가시간에 저승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메일을 보냈다. "어머니, 재거름 지고 장에 왔더니 그것도 괜찮은데요." 어머니의 메일 주소는 이경순의 영문 약자와 사망일을 앞세웠고 하늘나라 천국에 계시리라 믿고 lks0527@heaven.sky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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