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소리가 마치 피를 토하듯 처절한 느낌으로 들린다고 해서 자규(子規)란 이름으로 불리던 새가 있었지요. 자규란 두견새, 접동새란 이름으로도 불리던 소쩍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옛 선비들은 멸망한 왕조의 슬픔을 이렇게 새 울음소리에 견주어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근대 가수들 가운데서 두견새의 흐느낌처럼 거의 절규와 통곡에 가까운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험난했던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온몸으로 역사의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고난의 시기를 피눈물로 절규했던 가수 남인수(南仁樹)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산유화'란 노래의 한 소절을 기억하시는지요?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님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마는 님은 어이 못 오시는가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유화 1절)
이 노래의 창법은 거의 통곡과 절규처럼 들립니다. 김소월의 시작품 '산유화'를 연상케 하는 이 가요작품은 어떤 우여곡절로 인하여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비명에 세상을 떠난 모든 생령들을 흐느낌으로 위로하고 애틋했던 존재를 더듬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근대사에는 그러한 중음신(中陰身)들이 참으로 많겠지요. 언제였던가? 다정한 벗과 더불어 어느 해 늦가을 지리산 세석평전에 올라 어둑한 저녁에 텐트를 쳐놓고 앉아서 반합 뚜껑에 소주를 부어 서로 권하며 이 노래를 밤새도록 함께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험난했던 역사의 언저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념의 포로가 되어 지리산 골짜기로 내몰렸던 가엾은 청년들의 짧았던 생애를 더듬으며 그날 밤 우리는 이 노래를 절규로 불러서 그들에게 헌정했던 것입니다.
가수 남인수는 40여 년 가까운 생애를 통하여 무려 1천 곡가량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많고 많은 노래 중에서 공연 중 앙코르를 요청받을 때 반드시 이 '산유화'로 팬들에게 보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노래는 남인수 자신이 정작 가장 사랑했던 작품이었던가 봅니다. 낡은 유성기 음반으로 들어보는 '산유화'는 그것이 단지 한 편의 대중가요가 아니라 매우 격조 높은 성악곡을 듣는 듯 놀라운 예술성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팬들에 의해 '가요황제'로 불렸던 남인수는 191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서 진주 강씨 문중으로 들어가 호적 명이 강문수(姜文秀)로 바뀐 것이지요. 그러다가 가수로 데뷔한 뒤에 작사가 강사랑에 의해 남인수란 예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더라도 경남 진주는 가수 남인수의 제2의 고향이자 성장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이미 작곡가 손목인, 이재호, 이봉조 등을 비롯하여 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남인수, 즉 강문수가 가수로 본격 데뷔하게 된 것은 시에론레코드사 사무실에서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이던 문예부장 박영호와의 운명적 만남 직후였습니다. 1936년, 18세의 나이로 남인수는 '눈물의 해협'(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을 최초로 취입하게 됩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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