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안에서 일(연회장에서 운검으로 하여금 세조를 제거하는 일)이 성공하도록 하라. 내가 밖에서 군사를 거느린다면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어찌 제압하기 어렵겠는가."
삼군도진무(정2품'군 최고위직) 김문기(金文起'1399~1456)가 박팽년과 성삼문 등 사육신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어린 단종 복위를 모의하면서 이른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들은 세조 2년(1456년) 6월에 있었던 단종복위(端宗復位) 거사를 모의했지만 배신자 김질의 밀고로 좌절하고 말았다.
"친자식들은 모두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 처첩, 조손(祖孫), 형제, 자매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부'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고을 관아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켜라."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의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이때 모의에 적극 가담한 40여 명은 사지가 찢겨나가는 생체거열형(生體車裂刑)을 당했다. 수백여 명에 이르는 식솔과 처족은 죽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그 아픈 역사의 중심에 백촌 김문기가 있었다. 후손들이 집성을 이룬 김천 대덕면 조룡마을의 섬계서원(剡溪書院)은 '불사이군'(不死二君)의 충신 백촌 김문기를 모시고 있다.
◆유림에서 건립한 섬계사
승용차로 국도 3호선 거창'무주 방면으로 김천의 젖줄인 감천을 따라가면 대덕면사무소에 못 미쳐 가례마을을 만난다.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백두대간의 한 자락인 새재(鳥峴'조현) 아래에 조룡마을이 있다.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 주변 산천은 겨울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울긋불긋하게 차려입었던 산과 들이 치장을 걷어내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감천을 흐르는 냇물은 얼굴이 비치도록 맑아졌다. 여름에는 더위를 씻어 주었건만 차가운 물줄기는 손 담그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큰길을 벗어난 소로는 고즈넉하다. 10여 분을 갔을까 마을에 닿는다.
조룡리는 옛날 어느 선비가 마을 앞 웅덩이에서 낚시로 용을 낚았다 하여 조룡(釣龍)이라 한다. 이 마을은 섬계서원이 들어서면서 섬계 또는 섬실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생겼다. 마을은 김녕 김씨 충의공파 후손들이 주로 거주하는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섬계서원은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마을 주민의 설명이다.
길을 따라 흐르는 섬계천 옆에 자리한 서원은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늘 높이 솟은 은행나무는 섬계서원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됐다. 어디를 가나 서원 주변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나름 이유가 있다. 공자(孔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고, 유생들의 학문이 은행처럼 주렁주렁 달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은행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한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회나무가 손님을 맞이한다. 회나무는 과거(科擧)에 급제하면 기념으로 심는 '학자수'로 알려져있다. 곧게 자란 회나무가 섬계서원의 품격을 상징한다고 할까. 외삼문을 들어서자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로 가득했을 강당 경의재(景毅齋)가 세월의 풍상에도 자못 늠름하다. 경의재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 오롯이 서 있는 비석과 만난다. 오랜 비바람 속에 글씨가 많이 훼손됐지만 섬계서원 '원허비'(院墟碑)다. 단종 복위로 멸문지화를 당한 김문기는 260여 년이 지난 조선 영조 7년(1731년)에야 원한을 풀었다. 그 후 1802년(순조 2년) 후손과 지역 사림에서 백촌 김문기를 제향하는 사당인 섬계사(剡溪祠)를 건립하고 지역의 유생들을 모아 강학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했다. 1866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기까지 비문에는 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불사이군의 충신 백촌 김문기
경의재를 지나 내산문에 들어서면 세충사(世忠祠)가 나온다. 1961년 복원된 세충사에는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 김문기(金文起)를 '주향'(主享)으로, 함께 순절한 맏아들 영월군수 김현석(金玄錫)을 배향하고 있다.
백촌은 1399년(정종 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1426년(세종 8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 해석작업에 참여했다. 함길도 도진무와 병조참의,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며 문무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함길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을 맡아보던 중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반(反)수양파'로 몰렸다. 마침 이징옥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함길도 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왕위에 오른 세조는 문무에 두루 밝을 뿐만 아니라 중신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운 백촌 선생을 회유하고자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의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문종으로부터 단종의 보호를 고명(顧命)받은 바 있는 그는 세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를 계획한다.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의기투합하여 세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1456년(세조 2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통상 어전에는 2품 이상의 무반 2명이 좌우에 시립하는 운검(雲劒)을 세운다. 이날 연회는 세조와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같이 대전으로 나가게 되었고 별운검 3명(성승'유응부'박정)이 설 예정이었다. 이들 모두 단종복위 거사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운검을 맡은 이들이 세조를 베고 도진무 김문기는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진입하기로 결의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러나 더운 날씨에다 협소한 공간을 이유로 운검이 폐지되고 거사가 미뤄진다. 후일 다시 때를 살펴 거사하기로 계획을 미뤘지만 계획이 틀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김질이 모의사실을 장인 정창손에게 알렸고 김문기를 비롯해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회유가 이어졌다. 김문기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과 함께 사지가 찢겨나가는 거열형을 받고 순절했다. 이때 장남인 영월군수 김현석도 함께 죽임을 당한다. 부인과 딸, 며느리는 고관의 노비로 보내졌고 손자들은 상주 관아의 노비가 되었다. 참혹한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의 대가라기에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러나 공의 충절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마침내 영조 7년 관작(官爵)을 회복하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또 1778년(정조 2년)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의정부 좌찬성, 홍문관 대제학이 증직되었다. 또 만고충신에게 내리는 불천위(不遷位)에 봉해졌다.
여기다 후손들의 탄원으로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원사육신'으로 등재된다. 이듬해 5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봉안하고 사육신 공원 내 의절사(義節祠)에 선생의 위패를 안치했다.
◆섬계서원에 배향된 또 다른 인물들
세충사 옆 동별묘(東別廟)에는 지례현 출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을 주창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와 제자인 절효 윤은보(尹殷保), 남계 서즐을 아울러 배향하고 있다. 윤은보와 서즐은 1434년(세종 16년)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恩報感烏)라는 제목으로 행적이 실려 있다. 자손이 없는 스승 반곡을 위해 부모의 예로서 효행을 다한 대효자로 이름이 났다.
삼강행실도에는 이들 두 사람이 스승 장지도가 병이 나자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사후에는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고 전한다. 윤은보가 시묘살이 중 아버지까지 상을 당하자 두 곳의 묘를 오가며 곡을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회오리바람이 불어 향로가 날아갔다. 몇 개월 뒤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었는데 살펴보니 잃어버린 향로였다고 한다. '은보감오'라는 제목은 까마귀도 윤은보의 효성에 감탄해 날아간 향로를 물어다 줄 정도로 감동을 시켰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면서 무덤을 떠나지 않고 3년상을 마쳤다. 1432년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이들에게 정려와 벼슬이 내려졌다.
옛 선비들의 효행담에 취했다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속을 헤치고 따스한 햇살이 고개를 내민다. 500년을 지켜온 은행나무도 한 줄기 바람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고엽을 흩뿌린다. 예고 없이 찾아온 나그네의 인기척에 놀란 모양이다.
글'박용우 특임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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