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느덧 이동이 쉬운 '지구촌'으로 좁혀졌다. 여행과 이주가 일상화되면서 낯선 나라에서의 경험 또한 일상화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은 때로 '여기'에서보다 낯선 세상에서 좀 더 민감하고 불안하게 움직인다. 대구미술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디스로케이션(dislocation)전을 2013년 2월 11일까지 연다. 디스로케이션은 라틴어로 '해체'라는 의미다. 전통적 장르, 구조의 틀, 형식적 맥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세계를 유목민처럼 떠다니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 11명을 불러모은다. 이들은 공통으로 이주의 경험이 있고, 이 속에서 자신의 소속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 작가들이다. 개인은 물론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질문해온 작가들의 생생한 고민을 작품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정연두는 사진을 통해 '진짜'와 '가짜'에 대해 묻는다. '로케이션'은 실제 풍경과 연출된 상황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사진 연작이다. 맨해튼의 빌딩숲 거리에 바다 풍경 사진을 걸어두고,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 어느 것이 실제 풍경이고, 가짜인지 모호해진다. 진해군항제 한가운데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연출해 사진을 찍는다. 허구와 실제를 오가는 그의 사진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특히 뉴욕 거리 1㎞가량을 수천 장 사진을 찍어 기록한 작품 '식스 포인츠'(six points)는 사진과 영상의 경계를 보여준다.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주어 거리를 걷는 행인들은 마치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평론 글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이다.
한성필은 베를린 중심부 '마르크스-앵겔스 포럼' 광장에 설치되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과 같은 작품을 미술관 한복판에 옮겨놓았다. 순백의 화이트 공간에 설치된 작품을 바라보면 일순간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다. 이제는 사회적 의미를 상실한 조각상인 것이다. 이 동상은 1986년 원래 광장 한가운데 동쪽을 바라보게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2010년 지하철 공사로 옮겨지게 되고, 작가는 이 과정을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보여준다. 한때 종교나 다름없었던 두 사람의 동상은 근로자들에 의해 해체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서쪽을 바라보도록 설치된다. 30여 년이란 시간을 사이에 둔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와 닿는다.
서도호는 '집'을 통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대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내 집이면서 그 어느 곳도 내 집이 아니다'는 작가의 말처럼, 작가는 서울과 뉴욕, 런던 집들의 구조를 혼합해 보여준다.
바이런 킴은 하루를 기록처럼 보여주는 '일요일 그림'을 선보인다. 작업실에서 바라본 일요일 하늘을 일기처럼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일기가 덧붙여진 그림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일상을 스냅 사진으로 찍은 후 이어붙인 '내가 바라보는 것'은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으로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쓸모없이 버려진 물건을 모아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 조숙진은 '생과 사가 교차하는 지점'인 십자가를 '바다와 땅이 만나는' 해안가 모래사장에 설치하고, 이를 건져 태우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30년간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윤향란은 작가가 일상에서 실제로 사용한 공문서에 드로잉한 작품 '붓놀이'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작가가 경험했던 절망과 불안한 심리를 담고 있다. 타국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인 세금 신고서, 작가 등록증, 의료보험증 위에 직접 드로잉하며 자신이 경험한 디스로케이션을 보여준다.
2008년 토리노 트리엔날레에 소개된 적 있는 양혜규의 작품 '쌍과 짝'은 작가의 서울 집과 베를린 집에 있는 냉장고, 가스 스토브, 보일러, 샤워기, 세탁기 등의 생활용품의 형태를 설치작품으로 보여준다. 일상적 오브제를 사용해 개인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놓인 장소적 문맥을 함께 고려한 작품이다.
오인환은 독특한 방식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되묻는다. 작가는 친구의 집을 샅샅이 뒤져, 자신이 가진 물건과 공통된 것들을 끄집어낸다. 결국 소유한 물건은 정체성을 드러내고, 작가와 친구의 공통된 취향과 정체성을 보여준다.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여기에서 발견된 개인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사회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프랑스에서 30년을 살고 있는 작가 한순자는 '원'에 집착한다. 평생 동그라미만 그리고 만들어온 작가에게 원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한다. 허은경은 옻칠이라는 전통적 기법을 이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또 작가가 창조해낸 괴기한 생명체를 통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재해석한다. 구정아는 버려진 비닐, 담배, 패널 등 일상적이고 하찮은 존재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관객들은 거시적 미술 담론에서 벗어나 일상에 스며든 현대미술을 느낄 수 있다. 낯설고 색다른 작품을 거닐면서 흔들리는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053)790-3000.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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