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가야의 세력 균형은 완전히 달라진다.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남가라국(금관가야'김해)이 맹주였던 전기 가야연맹은 신라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연합군에 궤멸당하면서 가야연맹은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가 주도하는 후기 가야연맹 시대로 들어선다.
가야 왕국은 경남 지역에서도 강한 세력을 유지했다. 아라가야는 함안을 중심으로 의령과 창원 진동'현동, 진주 일부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고, 창녕에는 '비화가야' 혹은 '비사벌'로 불리는 가야 세력이 맞대고 있었다. 또한 대가야는 백제가 약해진 틈을 타 남원과 하동, 임실, 광양, 여수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아라가야의 숨결이 잠든 말산리 고분군
이달 15일 오후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함안박물관. 박물관 뒤쪽 산책로를 따라 오르자 나지막한 구릉이 이어졌다. 함안에서 가장 높은 여항산(744m)의 능선이다. 나지막한 능선에는 고분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말산리 고분군이다. 이곳에는 37기의 수장급 무덤이 잠들어 있다. 특히 9호분 오른쪽으로는 높은 산맥이 시야를 막고, 왼쪽 함안군청 앞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1천500년 전, 고된 농사일에 지친 허리를 편 백성들의 눈에는 왕의 무덤들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함안의 물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남해안 쪽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서는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한다. 광여산과 서북산, 화개산, 안국산, 천주산, 작대산, 여항산 등으로 둘러싸인 함안은 구릉을 경계로 중앙의 가야권과 왼쪽의 군북권, 오른쪽의 칠원권으로 구분된다. 삼한시대에 군북'가야권은 안야국, 칠원에는 칠포국이 세를 떨쳤다.
당시 낙동강은 비만 오면 차고 넘쳐 들을 덮쳤다. 사람들은 물넘이를 피해 제방을 쌓았고, 그마저도 모자라 강에서 뚝 떨어져 살았다.
아라가야의 전신(前身)은 안야국(기원 전 200년~기원 후 300년)이다. 소국이었던 안야국은 마산'창원'고성 등을 장악하던 남해안의 8개 소국과 벌인 '포상팔국 전쟁'을 통해 왕국으로 성장했다. 포상팔국은 너른 평야를 낀 내륙 소국인 안야국을 차지하려다 되레 멸망당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안야국은 해상 무역을 기반 삼아 아라가야(안라국)으로 성장했다.
말산리에 거대 봉분이 생겨난 건 대체로 5세기 후반부터다. 여항산에서 남북으로 1.5㎞가량 이어지는 구릉에 고분이 들어섰다. 함안에는 대형 고분이 100여 기 이상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말산리 고분군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가 4호분과 25호분을 발굴'조사하며 학계에 알려졌다. 4호분은 지름 40m, 높이 10m로 함안의 가야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이후 1990년대 들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복원하며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졌다. 아라가야 무덤은 주로 수혈식 석곽묘(돌무지덧널무덤)다. 가야의 고분들은 산 능선을 타고 들어선다. 평야에 봉긋 솟아 있는 신라의 고분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가야의 고분은 주능선을 타고 수장들의 무덤이 들어서며 지능선에는 다소 규모가 작은 옛무덤이 들어서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주능선과 지능선에 들어선 고분들의 규모는 큰 차이가 없다.
아라가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함안 지역의 지질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석실은 대개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해 흙더미의 무게를 견뎠다. 하지만 화강석이 드물고 무른 퇴적암이 대부분인 아라가야는 봉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무덤 안쪽 벽에는 6개의 구멍을 뚫고 통나무를 끼워 토압을 견뎠다.
◆배달 소년의 기적같은 발견
1992년 6월 6일 오전 7시. 신문을 돌리던 배달 소년의 눈에 이상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당시 가야읍 도항리에는 해동아파트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소년은 굴착기가 퍼낸 흙더미 속에서 우연히 철편을 발견했다. 소년은 곧바로 지국으로 달려가 자신이 본 광경을 설명했다. 창원대 사학과 출신이던 지국장은 인근 성산산성에서 발굴조사를 하던 창원문화재연구소 박종익 연구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종익은 굴착기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오전 작업을 시작하려던 굴착기를 온 몸으로 막고, 흩어진 쇠를 모았다. 가야시대 온전한 말 갑옷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는 말 몸통 좌우를 감싸는 갑옷과 말 얼굴을 감싸는 마면주(馬面胄)까지 발견됐다. 이후 2007년 경주에서 말 갑옷이 발견되기까지 이 말갑옷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가야시대 갑옷이었다.
말갑옷과 함께 아라가야 유물의 대표적인 유물은 불꽃무늬토기다. 원에 삼각형 고깔을 씌운 듯한 무늬를 새긴 그릇이다. 5, 6세기 아라가야 전성기에 만들어진 토기로 전체 발굴된 유물 중 함안지역에서만 80% 이상 출토된다. 불꽃무늬라는 이름은 이 토기의 독특한 투창(토기에 뚫린 구멍) 모양에서 나왔다. 거창과 김천, 경주, 부산, 일본의 교토 및 나라 등지에도 출토된다. 이는 당시 아라가야가 이웃한 신라와 금관가야, 대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라국의 권역인 의령과 함안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수레바퀴 모양 토기'도 대표적인 유물이다. 대부분 대형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토기로 아라가야의 최전성기인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발견된다.
아라가야의 유적은 아직 땅 밑에 잠자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농촌 지역이다보니 개발로 인한 발견이 더딘 데다 주요 고분 위로 주택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함안 박물관 김수환 학예연구사는 "왕궁 추정지 등에 대한 지표 조사가 이뤄져야하지만 이미 주택가가 들어서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생활 유적 등 다양한 유물을 찾는 노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번성하던 아라가야는 서기 540년대에는 가야 남서부 지역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며 신라'백제 사이에서 독립과 안전을 추구했다. 아라가야는 540년에 가야의 중심세력이 되어 외교적으로 신라'백제와 접촉하면서 안전을 요구하였으나 백제 때문에 실패했다. 안라국은 고구려와 밀통해 548년 고구려와 백제 간의 독산성 전투를 유도했지만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하면서 다시 백제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됐다. 이후 신라가 550년대에 한강유역 전투에서 백제를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지역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자, 559년(추정) 신라에 항복했다.
◆역사 속에 단 한 줄 '비화가야'
16일 오후 경남 창녕군 교동 고분군. 이곳에서는 현재 지난해 6월부터 교동 7호분의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교동 7호분은 지름이 36~38m, 높이는 10m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이다. 화왕산에서 내려온 능선을 타고 온 고분 행렬은 7호분에서 정점을 찍는다. 특히 7호분이 중심에 있고, 주변에 작은 고분들이 배치된 '위성식 배치'가 특이하다.
교동 7호분은 가야 말기에서 신라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라식 무덤에 가깝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7호분은 1918년 일제에 의해 발굴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어떤 유물이 발견됐는지는 기록이 없다. 1970년 일본인 학자 아나자와 와코우는 무덤의 일부 도면을 확보하고 당시 토기와 금동관 등이 발견됐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무덤의 주인이 '왕'의 신분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우리문화재연구원 조성원 팀장은 "무덤 구조와 봉토한 방식, 매장 주체 부의 성격 등을 조사해 창녕에서 반출된 유물과 당시 조사 성과를 파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창녕의 비화가야가 등장하는 문헌은 오직 '삼국유사' 뿐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지금 창녕 지역을 비화가야라 했다"고 쓰고는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덧붙인다. 정작 가야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학계는 분명 가야 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대규모 고분이 무려 200~300기나 되는 데다 창녕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가야시대 토기 때문이다. 창녕에는 토기의 투창 모양이 '엇갈린 사다리 모양'에 뚜껑이 툭 튀어나온 토기가 발견된다. 이곳의 무덤 형태는 구식 돌방무덤으로 역시 가야시기다.
송현동 고분에서 순장자로 발견돼 새로 복원된 '송현이'의 생존 연대도 서기 420년~560년 사이로 추정된다. 가야인일 가능성이 높지만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인일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창녕에서는 '비화가야'라는 이름 대신 '비사벌'이나 '비자화 가야', '비자벌', '비지구' 등 다양하게 불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토기는 5, 6세기 창녕에서만 발견된다. 현재 창녕에는 36기의 고분이 발굴'복원됐다. 횡구식 석실분(세 벽을 구축하고 천장돌을 덮은 다음 한쪽으로 주검을 넣고 밖에서 벽을 막아 만든 무덤)이 주로 발견된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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