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은 고려청자의 고장이다. 현재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고려청자 중 80%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강진에서는 아름다운 비취빛깔의 청자에 걸맞게 오래전부터 전통 음식도 굉장히 다양하게 발달했다. 그래서 강진사람들은 "강진에서 우리나라 한정식이 처음 생겨났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교자상 가득 차려내는 강진 남도 한정식에서 향토 음식 산업화의 길이 보인다. 정성이 담긴 남도 한정식의 정갈한 상차림은 한식 세계화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강진 청자골 종가집 '45첩 반상'
남도 특유의 곰삭은 젓갈과 장맛, 알싸한 홍어 삼합에 이르기까지. 강진 남도 한정식은 전라도 음식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맛볼 수 있다. 강진 읍내에는 기본이 45첩이고 무려 60첩짜리 반상이 있을 정도다. 상차림 가격은 1인당 1만5천원부터 10만원까지 다양하다. 1인당 3만원이 넘어서면 마치 중국의 음식점처럼 음식 접시를 2층으로 쌓아 상을 낸다.
한 번 가보기만 하면 손님마다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강진군 군동면 호계리 '청자골 종가집'을 찾았다.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 전통 한옥인 본채 안방에 들어서자 주인 김은주(59) 씨가 반찬으로 빼곡한 교자상을 냈다. 말로만 들었던 '45첩 반상'이다. '진연상'으로 불리는 이곳의 45첩 상차림은 호남지역 특유의 토속음식에 궁중음식과 퓨전한식까지 푸짐하게 차려낸다. 감칠맛의 떡갈비와 콩나물 가오리찜, 야채 잡채, 치자로 물들인 연근 유자청 조림, 참깻가루로 속을 채운 찰떡 등 다양한 궁중음식은 물론이고 낙지 호롱구이, 영산포 홍어 삼합, 법성포 보리굴비찜, 대하구이, 키조개탕, 전복회, 생굴무침, 간재미 회무침 등 호남 지역 토속음식이 망라돼 있다. 게다가 훈제 오리와 표고버섯 탕수육, 도라지 초무침, 호박 양갱, 게살을 팽이버섯과 함께 싼 무쌈, 새콤달콤한 야채 샐러드 등 퓨전한식도 다채롭게 나온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이건 5년된 묵은지예요. 토하젓과 돈배젓은 옛날 임금님 진상품이지요" 주인 김 씨의 메뉴별 스토리텔링도 식욕을 돋운다. 너무 많은 접시 수에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여서 젓가락을 들고 한참이나 망설여야 했다. 무청에 밥과 마늘 양파를 갈아 넣어 만든 물김치인 '승건지'도 독특한 맛을 낸다. 유채 숙주나물, 땅콩 조청조림, 김 부각에 대구에서는 '뭉티기'라고 부르는 생고기도 눈에 띈다. 대합탕과 바지락국은 시원하고 무시래기 된장국도 일품이다. 고춧가루에 버무린 토하젓과 돈배젓(전어젓갈), 갈치속젓은 곰삭은 향이 감미롭다. 여기에 게장 무침까지 곁들여 놓으니 '밥도둑이 상 위를 떼 지어 다니는 셈'이다. 수저만 들고 있는 데도 공기밥이 금세 줄어든다. 한 접시 한 접시가 모두 정갈하기 이를 데 없다. 상 머리에 앉아 까무잡잡한 보리굴비를 발라주는 주인 김 씨의 단아한 모습은 영락없는 사대부집 종부다.
◆100년 고가옥에서 음미하는 맛과 멋
"요새는 촬영하자 하면 딱 거절해 버려요. 음식에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그러지요."
각종 맛집 방송마다 소개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청자골 종가집. 음식 맛도 맛이지만 100년이 훌쩍 넘은 전통 한옥을 음식점으로 활용하고 있어 고즈넉한 멋도 자랑이다. 1908년에 지어진 이 집은 광주시 충장로에 있던 건물을 1996년 집주인이 귀향하면서 고스란히 이곳으로 옮겨왔다. 백두산 홍송을 베어다 두만강, 동해, 남해를 거쳐 영산강을 거슬러 뗏목으로 옮겨와 지은 유서깊은 집이라고 한다. 황금소나무와 잔디가 잘 가꾸어진 널찍한 마당에는 100여 그루의 분재가 눈길을 끈다. 동백나무와 느티나무, 단풍나무, 모과나무 등 분재목 밑동의 굵기도 이 집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상차림으로는 임금님의 혼례 때 올린 고품격 한정식으로 '고배상'이 있고, 궁중의 경사나 외국 사신을 위한 상차림인 '진연상'과 대전, 중전, 대비전 등에 올렸던 궁중의 일상식 '수라상' 등으로 나뉜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제때 제맛을 내기 위한 집주인의 노력이 엿보이는 상차림이다.
"예쁜 청자 그릇에다 누가 투박한 꽁보리밥을 담으려고 하겠어요. 아름다운 그릇이 있으니 좋은 음식을 담으려고 애썼고 그러다 보니 청자고을 강진에 전통 한정식이 발달한거죠." 김 씨는 "강진이 자랑하는 청자 그릇에 보다 더 좋은 음식을 예쁘게 담고 싶어서 남도 한정식을 시작했다"고 했다.
별채도 한옥이지만 4인용 교자상 25개를 펼 정도로 넓은 공간이 마련돼 있다. 방마다 민화 그림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걸려 있고 군데군데 전통가구가 한정식집 분위기를 더해 준다. 대형 스크린에다 빔프로젝터도 설치돼 있어서 간단한 연수교육도 가능하다. 널찍하게 조성한 주차장도 전국의 단골손님들을 편하게 배려한 것이다. 모두 다 향토음식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전국 전통음식점 주인들의 공통적인 스타일들이다. 마침 방문한 날은 경북 군위축협에서 찾아 와 조합원들과 함께 선진 외식사업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귀양온 수랏간상궁이 궁중음식 전래
'어떻게 45첩 반상이 강진 지방의 한정식 상차림으로 정착할 수가 있었을까.'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아무리 벼슬이 높은 사대부 집안이라 할지라도 9첩 이상은 국법으로 금지했다. 왕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신분에 따라 상에 오르는 찬의 가짓 수를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오직 임금과 왕비만이 12첩 반상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45첩반상이라니. 처음에는 임금님 수라상 만큼 반찬 가짓수를 늘릴 수 없어서 음식의 모양이 청자그릇에 걸맞도록 화려하게 만들었다. 주인 김 씨는 "원래부터 45첩이 있었던 게 아니고 강진 한정식집 주인들이 남도 토속음식들을 모아 집대성하면서 차츰 반찬 가짓수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청자골이라 불리던 도자기의 고장답게 비취빛 청자그릇에 보기 좋은 음식과 식기들이 밥상을 장식하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강진 남도 한정식'을 완성시켰다는 이야기다.
강진의 한정식은 궁중음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강진 한정식의 상차림에서 보여주는 토속 음식과 퓨전음식 차림새의 기풍은 모두 궁중음식 풍이다. 강진 남도 한정식의 탄생 배경 스토리는 그 이유를 말해준다.
전라도에서는 '동(東)에 순천, 서(西)에 강진'이라는 말이 있다. 토지가 비옥한 강진이 순천과 함께 전라도에서 가장 부유한 고을이었다는 뜻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만큼 강진에는 예부터 부자들이 많았다. 조선후기 수라간 상궁 한명이 강진 목리(木里)로 귀양을 오게 됐다.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목리의 아낙네들에겐 수라간 상궁이 귀양온 것 자체가 관심거리였다. 임금님이 사는 궁궐의 호화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그래서 목리의 아낙들은 시간 나는 대로 그 상궁집을 찾아 살뜰하게 대해줬다. 그 대가로 귀양 온 상궁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궁중의 이야기였고, 재미난 이야기가 바닥나자 수라간에서 임금님께 올리던 궁중음식 만드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남도 한정식의 상차림은 너무 과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래서 접시에 담아내는 음식을 손님 수에 맞게 적정량을 조절하는 것도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센스. 그렇더라도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푸짐하게 내는 호남 특유의 차림새는 전국의 일반 한정식집과 비교해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그 자체가 소문을 내는 스토리텔링 마케팅. 이제 청자보다 남도 한정식이 강진의 첫 번째 자랑거리가 된 셈이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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