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안철수 씨의 日記(일기)

안철수 씨.

그는 지난 주말 내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약 그가 일기를 쓰고 있다면 어제 오늘 어떤 일기를 썼을지 궁금하다. 사퇴 후의 가상일기(假想日記)를 써보자.

'11월 25일. 맑음.

아침 일찍 눈을 떴다. TV를 켰다. 사퇴 발표 사흘이 지났는데도 뉴스에 또 내 얼굴이 나왔다. 내가 그때 저렇게 울먹이듯 말했던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격해 보이는 목소리, 조금은 떨리는 듯도 하다. 눈가엔 설움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물기가 어려 비친다. 내가 그때 울려고 했던가. 내가 봐도 북받치듯 말이 끊기는 느낌이 역력하다. 조금만 더 서 있었으면 정말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이날까지 성공과 성취의 길만 걸어온 내 이력에서 난생처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두렵고 자존심이 무너져서였을까.

더는 볼 수 없어 TV를 꺼버렸다. 뒤척이며 생각해봤다. 내가 왜 그들(민주통합당)과 단일 후보 게임에 끌려들어 갔던 걸까. 여론조사 숫자의 마력만 믿고 나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 건가, 아니면 학업과 사업에 늘 승리해오며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자만 탓이었을까. 인생에서 후회가 앞에 온다면 나는 아마도 그 잘못된 게임에 패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늘 일이 그르쳐진 뒤에 오는 법이다.

단일화 게임. 이제 생각하니 시작부터 모순의 게임이었다. 나를 밀어준 젊은 세대와 정치 쇄신 열망 계층이 동조했던 어젠다는 바로 구태 정치의 쇄신이었다. 그런데 나는 카드를 거꾸로 집은 거다. 문재인의 친노 민주당 구 세대 그룹은 실패한 정권의 낡은 정치 그룹이다. 그들에게 입으로는 구태(舊態) 정치 쇄신하라고 말해놓고 박근혜란 구태를 누르기 위해 그 구태와 합종연횡의 정치 수단을 택하려 한 나 자신은 또 다른 구태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나 스스로 내 논리의 모순을 만들어 버렸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내 지지층이 서서히 균열되기 시작한 것도 그 모순을 새로운 구태로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하 시인이 나를 보고 '깡통'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나는 정치에 대해선 깡통이었나 보다.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말만 그럴듯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과연 내 마음속 깊이 나를 갖고 놀다시피 한 그들을 위해 백의종군할 진정성이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과연 그럴 수 있을 만큼 나의 배포가 클까. 어쩌면 나는 백의병사(白衣兵士'전쟁터에서 상처 입고 병든 군인을 말함)인지 모른다. 아니면 백의창구(白衣蒼狗'하늘의 구름이 흰옷 모양이 되다가 금방 강아지 모양으로도 바뀐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쉽게 잘 변함을 일컬음)거나. 차라리 기자회견 때 백의종군 대신 '나는 단일화 게임에서 상처받고 병든 '백의병사'(또는 백의용사)요. 흰옷에서 강아지로 바뀌어버린 '백의창구'라고 했더라면 동정이라도 받았을지 모른다.

나 안철수는 일찌감치 '철수'(撤收)하고 문재인은 '문제 있는 사람(人)'이며 박근혜는 오르락내리락 그네 타듯 불안하지만 근근이 이겨 그네 위로 날아오를 거란 우스개마저도 지금은 예사롭잖게 들린다. 그 블랙유머대로 나의 사퇴는 정말 '양보'가 아닌 '철수'의 모양새가 돼버렸다. 진정한 아름다운 양보였다면 문 캠프에 미리 알리고 문재인과 함께 손잡고 카메라 앞에 나서 '내가 양보하겠소'라고 했어야 했는데…. '나 홀로 회견'을 한 건 마음속에 원망과 억울함이 남아서였을까.

아직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뉴스에서 그들은 선거대책위원회에 내 캠프 사람들을 끌어넣으려는 것 같다. 그게 통합일까, 구태의 재탕일까. 이제 나는 내 캠프서 고생한 분들에게 거기 들어가라 마라 할 처지도 아니고 그럴 염치도 없다. 구태의 재탕이라 여기면 안 들어갈 거고 딴생각 있으면 들어가겠지. 그보다는 내 가슴을 때리는 후회가 따로 있다. 나를 희망과 새 정치의 메시아로 쳐다봐 왔던 젊은 세대에게 끝까지 정치 소신을 지켜내는 불굴의 패기와 용기 대신, 중도 사퇴로 좌절과 유약함, 이기적 소심함을 보여준 후회와 부끄러움이다. 그 후회를 안은 채 '짝퉁 노무현' 부대의 깃발 아래 들어가 박근혜와 싸워주는 게 맞을까. 아직은 밤안개처럼 희미해져 있는 내 머리로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그러면 또 후회할 것 같다. 잠이나 더 자야겠다. -오늘 일기 끝-'

김정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