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박 후보의 여성성

"결국 터질 게 터지는구먼!"

황상민 교수의 언급으로 박근혜 후보의 '여성성'이 시끌벅적한 화제가 되자, 어느 분의 입에서 기다린 듯 나온 말이다. 아직도 성차별이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 '여성' 대통령에 대해 별 논란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는 생각을 깔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제는 본격적인 논란도 일으키지 못한 채 뒤꿈치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황급히 스쳐갔다.

실제로 우리의 성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달 발표된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의 '2012년 세계 성차별 보고서'에 따르면, 135개국 가운데 한국은 108위로 이슬람 국가들(아랍에미리트 107위, 쿠웨이트 109위, 나이지리아 110위, 바레인 111위)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같은 아시아 지역의 필리핀(8위), 몽골(44위), 중국(69위)과 비하면 훨씬 처진다.

우리와 성차별 수준이 비슷한 이슬람 나라에서 여성이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을까? 큰 파란이 일어나야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마땅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성차별의 현실에 비추어 유독 여성 대통령 후보에 대해서는 별 야단이 없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얼마 전 총선에선 여성 후보의 전략 공천 지역 배치와 의무 할당 비율에 대해 역차별이라 비판하며, 정당은 여성운동을 위한 곳이 아니라며 서슬이 푸르렀다.

어떤 사람들은 박 후보의 이미지에 여성다움이 특별히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은 모습은 보기 어렵고, 주로 재킷에 바지를 받쳐 입고 등장한다. 이런 거의 중성적인 인상이 여성임을 희석시킨다는 이야기다. 실상 황상민 교수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육체적으로 여성인 것보다 사회'문화적으로 여성다움, 특히 여성의 역할 수행이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어휘 선택 문제를 제쳐 두고 보면,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거의 교과서적인 이야기다.

한편 이미지나 사회적 인식보다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박 후보 자신이나 여당이 여성 문제 해결을 특별히 정책 공약으로 내세우거나, 여성을 정치적으로 세력화하여 이를 대변하지 않는다. 또는 여성 정치인으로서 차별화된 리더십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특별히 여성 후보로 주목을 받을 만한 점이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들이 나름으로 일리를 갖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성차별 수준을 고려한다면, 선뜻 수긍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 여성 논란이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박근혜라는 한 정치인에게 너무 주목하지 말고 정치판의 전반적 구도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성차별은 전통적 관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런 관습이 유지되는 것은 한 사회의 보수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런 관습의 부당함을 지적'비판하고 개선과 철폐를 요구하는 것은 진보적 입장이다. 이런 보수'진보의 구도에서 박 후보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즉 보수 진영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진보 진영의 후보와 각축을 벌이는 형국이다.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개연성은 보수 쪽이 높지만, 보수 세력은 자신의 후보이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한편 진보 진영에선 이런 논란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이며, 스스로를 정체성의 위기로 치닫게 한다. 결국 누구도 감히 여성을 문제 삼을 수 없는 기막힌 위치에 박 후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셈이다.

박 후보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선 양면적 의미를 드러낸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우리 사회는 박 후보의 정치 구도적 위치 덕분에 성차별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별문제 없이 여성이 최고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런 맥락에서 박 후보 개인의 행운은 우리 사회의 행운으로 통한다.

다른 한편 성차별이 문제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설사 여성 대통령이 나와도 성차별 현실이 개선될 가능성엔 그림자가 드리운다. 쟁취한 승리가 아니라 묵인된 당선은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유사한 방식으로 당선된 흑인 시장이나 대통령이 인종 문제 해소에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야말로 "가장 큰 변화이자 정치 쇄신"이라 여당은 말하지만, 이런 태생적 족쇄를 벗어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황 교수의 언급에 잠시나마 여당이 유독 발끈한 것은 내심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불편한 심기의 뇌관을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재정/대구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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