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에 대한 서구 지식인들의 열광이 절정이었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민에 대한 공산주의 정권의 폭력이 가장 잔혹했을 때인 1935년부터 1939년 사이, 그리고 1944년에서 1956년 사이였다. 이때 소련과 그 동구 위성국에서는 조작재판과 숙청, 그에 이은 인민의 학살이 '산업적 규모'로 자행되고 있었다. 서구 지식인들은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공산주의를 찬양했다.
그들을 이러한 '정신의 외설'(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말)로 이끈 것은 스탈린과 공산주의는 '우리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공산주의 폭력은 사르트르 등이 지칭했듯이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이요 '역사의 산파'였다. 말하자면 그들에게서 공산주의 범죄는 '역사와 거래하는 비용'으로 용서받았던 것이다.('포스트 워 1945-2005' 토니 주트) 그래서 그들은 공산정권 내부의 비극적 실상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닫았다.
이런 혼몽을 합리화하는 도구는 '반(反)파시즘론'이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는 파시즘이고 반동(反動)이며 이에 대한 반대 즉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것, 아니면 적어도 반(反)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역사의 진보라는 논리였다. 당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내걸었던 '필요한 폭력'은 이런 단순논리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그들의 명쾌한 이분법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자들의 혀까지 굳게 만들었다. 반동의 오명을 쓰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정치소설 '정오의 어둠'의 작가 아서 쾨슬러는 그런 비겁함을 이렇게 질타했다. "우리는 잘못된 논거로 사람들이 올바르게 되도록 도울 수는 없다… 자신이 사악한 무리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정치적 결백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지난주 국민은 홍모 씨의 '박근혜 아버지 출산 그림'을 통해 그런 비겁함을 또 한 번 목도했다. 성희롱 사건 때마다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던 이른바 진보 진영 여성단체는 모두 어디 갔는지 참으로 조용했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니카라과 정부군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게릴라 지도자 아우구스토 산디노를 살해하고 정권을 틀어쥐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이렇게 말했다. "그(소모사)는 개자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개자식이다." 진보 여성계에게 홍 씨는 그냥 '×자식'일까 아니면 '우리의 ×자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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