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나는, 완행 스타일

나는 여러 교통수단 중에 기차를 가장 즐겨 이용한다. 그중에서도 무궁화호를 타게 된다. 무엇보다 차비가 싸지 않은가. 또 모처럼 여행자의 느긋한 기분을 세 시간 남짓 만끽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즐겁다. 내가 지금 사는 천안에서 동대구까지 어림잡아 10여 개의 역이 있는데, 안내방송에서 그 역들을 하나씩 호명할 때마다 쉼표 찍듯, 나는 호흡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완행열차를 타면, 복잡한 객차 통로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느낌은 '각별'하다. 길거리에서 서로 스쳐 지나가게 되는 인파, 그 뭇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주말이면 학생 등 젊은이들이 많아 더욱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입석도 개의치 않고 튼튼한 다리로 버티고 서서 묵묵히 목적지까지 간다. 그들의 그런 태도가 믿음직스러운 것이다.

언제부턴가 외국인 배낭족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띄는 모습도 흥미로운 광경이다. 그중 잊히지 않는 한 외국인 여자가 있다. 그날은 소나기가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의 젖은 곱슬머리가 더 곱슬거렸던 것 같다. 그녀는 통로를 꽉 메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서 마침내 옆자리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러더니 내게 자신의 기차표를 펼쳐보였다. 그녀에게는 전혀 쉽지 않을 '조치원'이라는 발음을 해대며, 그 조치원을 꼭꼭 짚어가며, 여기 도착하면 꼭 일러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느린 손짓과 어설픈 영어로 바로 다음, 그다음 역이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래도 그녀는 불안한지 내릴 때까지 거듭 당부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작년에 인도 배낭여행을 하지 않았던가. 그때 내가 꼭 저 여자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묻고 또 묻고…. 그리고 또 커다란 보퉁이를 힘겹게 든 이주 노동자들의 피곤한 모습도 나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게 한다. 완행열차에서는 요즘 이렇게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 바야흐로 '다문화시대'가 자리 잡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완행열차를 탈 때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오히려 행복한 존재감을 느낀다. 크고 작은 역마다 사람들은 내리고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지지만, 함께 기차를 타는 동안만은 모두 '한 방향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행한다. 그 속에서의 긴 시간, 그 긴 여정이 바로 내 취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완행열차를 탈 것이다.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라는 말이 좀 거창하게 말해서 나의 신조(?) 가운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완행'이 실제 내 생활동작 중 이런저런 속도와 꽤 맞아떨어져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석미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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