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뮤직토크] 노래를 찾는 사람들(상)

노래모임 '새벽'이 모태…'민주'와 '자유'를 노래

대중음악은 시대를 투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한 시대의 상징적인 모습은 가사와 불려지는 형태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마련인데 대중음악이 사회참여의 중심 역할을 했던 1960년대 이후는 더욱 그렇다. 특히 프랑스의 68혁명(Mai 68, 5월 혁명)부터 일본의 전학련(全學連'젠가쿠렌)까지 이어진 1960년대 학생운동에는 노래가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 시대의 세례를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만 보더라도 음악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노래가 참여의 중요한 의미로 등장한 것도 1960년대였다. 이른바 청년문화는 알게 모르게 퍼져가던 해외의 학생운동 소문과 밥 딜런이나 조안 바에즈같은 모던 포크 가수들이 반전가수라고 소개되면서 대중음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를 시작으로 누에바 칸시온으로 발전한 남미의 노래운동처럼 시와 노래가 결합한 폰트라(PONTRA'Poem on Trash'쓰레기 위에 시를)가 김지하 주도로 시작되더니 가수로서 김민기의 공적 마지막 무대였던 맷돌 공연(정확하게 '맷돌 확대 공연', 1982년 9월 국립극장)에는 송창식, 서유석, 양희은 등 당대 청년문화의 기수들이 출연해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긴급조치 9호(유신헌법 반대 비방 및 반대 금지)로 좌절되는데 대중음악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있으면서 청년 문화의 꿈은 좌절된다.

많은 포크 가수들이 음악계를 떠나거나 도주자 신세가 되거나 아니면 기성 대중음악계에 편입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대학가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비록 대놓고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조용히 악보를 등사하고 숨죽여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던 이들은 1977년 '메아리'(1977, 서울대)를 만들어 본격적인 노래 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이듬해 이화여대에서 '한소리'라는 노래 모임도 만들어진다.

비록 당시의 학생 운동 분위기에서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노래 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모르는 소리였고 메아리나 한소리를 시작으로 1980년대 본격적인 노래운동이 시작된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충격은 대학가에 급속하게 퍼졌고 같은 해 12월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 대학가요제 출신 김종률이 곡을 붙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법 악보와 카세트테이프로 퍼지면서 노래운동은 절정을 이룬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70년대 '아침이슬'에 비견할만한 정서를 가지고 대학가에 퍼졌고 낭만적으로 치부했던 노래운동은 말하고 노래할 수 없었던 시절, 자유의 아이콘이 된다.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는 노래패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는 곳이면 선두에서 노래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주목할 움직임은 1984년 문승현이 주도가 되어 만들어진 노래모임 '새벽'이었다. 본격적인 노래운동을 표방한 새벽은 김광석과 안치환이 몸담았고 대중들에게 가장 각인된 노래운동집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모태가 된다.

권오성(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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