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제주 서부두 갈치회

다른 음식 기억 없고 갈치회 맛만 혀끝에 남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제주 하면 서부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서부두에 가면 육지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갈치회와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가거나 아니면 꿩 사냥을 하기 위해 일 년에 한두 번씩 다녀오곤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맨 먼저 택시로 7분 거리에 있는 서부두로 달려간다. 그곳에 가면 갈치회 전문식당인 물항 서부두 곶감식당 등이 있고 싱싱한 고등어회를 전문으로 하는 속초 만선 성복식당 등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주로 겨울에 가게 된다. 눈(雪)과 꿩(雉) 때문이다. 눈 내린 한라산에 오르려는 산꾼이나 풀 속에 숨어 있는 꿩을 잡으려는 사냥꾼이나 서부두의 갈치회를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다. 산엘 가든 사냥을 가든 공항에 내리면 갈치회부터 먹어야 다음 스케줄에 들어간다.

연전에 닫혀 있던 성판악~백록담 산행코스가 열린다기에 대구산악연맹 팀을 따라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내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우르르 서부두 쪽으로 몰려갔다. 횟집 문을 나서면서 산행을 끝내고 다시 갈치회 한 점씩 더 먹기로 약속했다. 그날 밤 숙소가 어디였는지 아침밥은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그런 것들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오로지 갈치회 맛만 혀끝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한라산에 눈은 제법 참하게 내려 있었다. 소나무와 전나무는 크리스마스카드 그림처럼 함박눈을 뒤집어쓴 채 산행 길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어쩌다 넘어졌다 일어서면 길섶 양쪽에서 '징글 벨'이란 캐럴이 징글징글하게 튀어나와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계속 달리라고 산꾼들을 부추긴다.

등산로는 앞서 간 등산객의 발길에 다져져 미끄러웠지만 아이젠을 신을 정도는 아니었다. 산행 대열은 속도를 냈지만 길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눈이 온 이튿날이어서 그런지 옅은 코발트색으로 밑 칠된 하늘은 너무나 선연하여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자기 미당의 '푸르른 날'이란 시가 읊조려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참 좋다. 어둡고 괴로운 날에도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했거늘 이렇게 빛 밝아 눈이 부시게 푸릇한 날에는 날 버리고 떠난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것을. 내가 죽고 네가 살아 있어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단 그 말씀, 그 말씀.

성판악 코스는 다른 길에 비해 비교적 평탄하지만 거리(9.6㎞)가 멀어 지겹다. 발 빠른 젊은이들은 4시간이면 백록담에 도달하지만 시니어 팀들은 5시간은 걸어야 한다. 그러나 주변 풍광이 기막히게 아름다운데다 어릴 적부터 정이 들 대로 든 산꾼들 간의 옛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오르게 된다.

드디어 정상이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백록담 구간은 눈이 워낙 많아 자칫 헛발이라도 디디면 빠진 다리를 찾을 길이 없다. 백록담 밑 양지 녘엔 소주에 삼겹살을 차려 놓고 다른 팀이 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빨리 내려가 1번 버스를 타고 서부두로 가야 하는데'란 생각은 술판에 끼어드는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다.

4시간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함께 온 악우들은 모두 내려 가버리고 아무도 없었다. 삼겹살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서부두 안 가요"란 말 한마디만 해 줬어도 갈치회를 먹고 왔을 텐데. 지금도 불쾌하다. 오! 개 아들님들.(Oh! son of b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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