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삼남매 중 누구든 만화방을 살리면 만화방을 물려주겠다." 2007년 초연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대구 토종 뮤지컬이 있다. 제목은 '만화방 미숙이'. 2천여 권의 만화책이 꽂힌 책장을 배경으로 삼은 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휴먼 코미디극이다. 홀로 삼남매를 키우는 만화방 주인 장봉구와 장녀 미숙이를 비롯한 온 가족이 빚에 허덕이는 만화방을 살리려 분투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면서 만화방은 김밥행상 조여사, 분식집 주인 명자, 만화가를 꿈꾸는 옆집 총각 진수, 공짜로 만화책을 보러 드나들기 일쑤인 달봉이 등 이웃들이 드나드는 훈훈한 '사랑방'의 모습도 보여줬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좌충우돌하는 연기에 '깔깔'거리다가, 노래와 춤에 어깨를 들썩이다가, 미숙이와 진수의 로맨스가 꽃을 피운 해피엔딩에는 그만 감격해 눈물도 찔끔했단다.
◆만화방 미숙이의 추억
대구 토종 뮤지컬인 '만화방 미숙이'는 이야기의 출처도 대구다. 극본을 쓴 작가 이성자 씨가 어릴 적 만화방집 딸내미로 보냈던 시절을 각색한 자전적 이야기인 것. 이 씨는 "'만화방 미숙이'는 대구 남구 봉덕동 716-3번지에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통일 만화방'을 운영했던 아버지에게 바치는 선물"이라고 밝혔다. 극 중 육군 상사 출신으로 홀로 삼남매를 키우며 만화방을 운영했던 주인 장봉구의 삶은 실제로 20년 직업군인 생활을 마치고 만화방을 차렸던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주인공 이름인 '미숙이'에도 사연이 있단다. 이 씨는 "어릴 적에 '미숙이'는 상당히 세련된 이름이었고, 내 이름 '성자'는 유난히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결국 둘 다 촌스러운 이름이 됐다. 둘 다 추억을 담고 있다"며 작명의 이유를 밝혔다.
◆점점 사라지는 만화방
'만화방'이라는 이름도 '미숙이'와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동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재미난 만화책을 보러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매력적인 이름에서 이제는 세월 너머로 사라지는 빛바랜 추억의 이름이 돼가고 있다.
지난달 28일 오후 찾은 대구 북구 경북대 캠퍼스 정문 앞. 이곳에는 만화방이 3곳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PC방'당구장'오락실 등과 함께 대학생들을 위한 저렴한 여가공간이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철거도 못한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출입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에는 '임대'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재학생 시절은 물론 졸업 후에도 이곳에 있는 만화방을 자주 찾았다는 직장인 김현수(31'대구 북구 복현동) 씨. 그는 "PC방보다 야간 정액요금이 저렴해 열대야가 극성을 부리는 여름에 밤새껏 만화책을 읽으러 간 적이 많다"며 "당구장'오락실'PC방은 세월의 변화에 적응하며 남았는데 만화방은 세월 너머로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명맥만 유지하는 만화방
물론 영업 중인 만화방이 대구에 10여 곳 넘게 있다. 지난달 26일 오후 8시쯤 찾은 달서구 상인동의 한 만화방. 중장년층 남성 5명이 소파에 앉아 무협지 등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낡은 소파에 뿌연 담배 연기가 특징이던 옛날과 달리 깔끔한 소파와 테이블에 담요'슬리퍼 등도 구비돼 있었다.
만화방도 세월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구에는 없지만 기존 '만화방'에 원두커피 등 음료를 판매하는 '카페'를 결합한 '만화카페' 프랜차이즈도 최근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찾는 손님이 점점 줄어드는 까닭에 신규 창업은 물론 내부를 새롭게 꾸미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란다. 달서구 상인동 한 만화방 주인은 "안 그래도 만화방이 침체기를 겪고 있는데 겨울은 가장 비수기"라며 "만화가 새로 나오면 인터넷 버전과 만화책이 함께 출시되기 때문에 발걸음하기 번거로운 만화방은 자연스레 외면 받는다. 여기에 손쉽게 만화를 볼 수 있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까지 최근 등장해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만화방을 주로 찾는 세대가 이전 청소년층에서 점점 연령대가 높아진 것도 침체의 이유다. 젊은이들은 여럿이 몰려다니며 자주 오지만, 어른들은 혼자서 가끔 오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오후에 찾은 대구 북구 태전동의 한 건물. 지하에는 만화방, 윗층에는 PC방과 당구장 등이 있다. 젊은이들은 어디로 여가를 즐기러 갈까? 입구에서 1시간여 동안 지켜봤더니 건물로 들어서는 젊은이 무리 모두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이곳 관계자는 "만화방이 대학가에 위치해 있지만 젊은이들은 외면한다. 저녁 시간대나 주말에 직장인들이 이따금 찾을 뿐"이라고 했다.
만화방은 겨울이 가장 비수기지만 일부 만화방은 갈 곳 잃은 사람들의 숙식 공간이 돼 '반짝' 북적이기도 한다. 주로 열차역이나 터미널 인근에 있는 만화방이다. 가출 청소년들이나 막노동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단돈 4천~5천원이면 하룻밤을 편안한 소파에서 보낼 수 있고, 만화방에서는 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빨래할 공간을 제공하고, 새벽에 일을 나갈 수 있게 모닝콜 서비스도 해준단다. 1998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만화방 운영도 힘들어
대구 도심에서 만화방을 찾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만화방 10여 곳 중 표시된 주소지로 찾아갔지만 업소가 없어 허탕친 경우가 4곳이었다. 단 몇 달 전에 영업을 하는 모습을 봐 뒀던 만화방 자리에 다른 업소가 들어서 있거나 비어 있기도 했다. 만화방 폐업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손님도 줄었지만 관계자들은 만화방에 대한 드러나지 않는 법적 규제도 침체를 거들고 있다고 토로했다. 한 만화방 주인은 "'전체 이용가'와 '19세 미만 구독 불가' 만화책을 따로 분류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 받을 수 있는데 만화방의 구식 인테리어상 제대로 분류하기가 힘들다. 또 흡연'금연석을 확실하게 구분하려면 내부 수리비가 많이 들어 엄두도 못 낸다. 팻말로 표시만 해뒀을 뿐"이라며 "이를 노리는 '파파라치'(포상금을 노리고 불법 사례를 사진으로 촬영해 제보하는 사람)가 적잖아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노출을 피하겠다며 취재진의 사진 촬영조차 거부한 만화방이 많았다.
◆그래도 만화책은 만화방에서
만화방은 1950년대 '대본소'라는 이름으로 첫 등장했다. 소장본으로 판매되는 만화책이 아닌 대여본으로 영업을 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둘의 구분이 거의 사라졌다.
사실 만화방은 여가를 취하는 '방' 문화의 원조격이다. 이후 후발주자 '방'들에게 점점 자리를 빼앗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불황 없이 건승했던 동네 곳곳의 만화방은 1990년대 후반 PC방이 붐을 일으키자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인터넷을 통한 만화책 스캔 파일의 불법 공유가 성행하며 더욱 자리를 잃었다. 최근에는 출판사에서도 수익을 위해 독자들의 접근이 쉬운 디지털 만화 서비스를 허용하고 있다. 만화책과 만화방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래도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맛보는 '손맛'에 매료돼 만화방을 찾는 마니아는 여전히 있다. 그러면서 '만화방은 아이디어 창고'라며 만화방이라는 공간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언급도 나온다.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태왕사신기' 등 시대'역사'판타지 대작 드라마를 연출한 김종학 감독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만화방에 자주 간다. 짜장면과 라면을 시켜 먹으며 밤을 새워 무협지와 대중소설을 읽는다. 내 아이디어의 원천이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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