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희의 동양고전 이야기] 한비자의 법가사상(1)

"법은 성문화되고 일관성 원칙 있어야"

한비자의 원이름은 '한비'(韓非, ?~BC 233)이고, 높여 부르면 '한자'(韓子)이나, 당 나라 문장가 한유(韓愈)도 '한자'라 칭하므로 혼동을 피하고자 '한비자'라고 부르게 됐다. 한비자는 춘추전국시대 한(韓)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이사(李斯)와 더불어 순자에게 배웠다. '한비자'라는 책은 BC 23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한비자 자신이 대부분을 쓰고, 약간 편은 후세 사람이 끼워 넣은 것이다.

한비자는 약소국인 한나라 왕에게 부국강병책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진나라 진시황이 그의 글을 보고 호감을 느끼고 만나고자 하였다. 그는 말을 더듬어 연설은 잘 못했으나 글은 잘 지었다. 진시황이 그를 만나보고자 이사의 건의로 한나라를 치려고 하자 한나라는 그를 진나라로 보냈다. 진시황이 뜸을 들이는 사이 동문수학한 간교한 이사의 모함으로 옥중에서 자살을 강요당해 죽고 말았다. 한비자는 순자의 성악설과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에서 힌트를 얻고, 상앙(?~BC 338)의 법에 군주의 통치술인 술(術)과 군주의 권력과 지위를 뜻하는 세(勢)를 합하여 법가사상을 체계화했다. 그의 문장은 반박의 형식을 취하면서 매우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또 이해를 돕기 위해 각종 고사, 우화를 동원했다.

전국시대 말기 약육강식이 공공연하게 펼쳐졌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하극상의 쿠데타도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작고 약한 나라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당시 과제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정치제도, 곧 봉건제도의 잔존은 국가의 존립과 군주의 생존을 어렵게 했다. 특단의 조처가 요청된 상황이었다.

하나의 돌파구로 '군현제'라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었던 때, 한비자는 이에 맞는 통치방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그는 다시는 유가의 인의(仁義)의 정치, 덕에 의한 통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한비자가 강조한 법치는 '법에 의한 통치'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도 '법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근본취지는 같은 것이다. 다만, 한비자의 법치에는 법치에 술과 세가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세습적인 군주체제는 오늘날 국민의 참정권에 의한 법치와는 다르다. 그러나 한비자가 주장한 법치의 정신은 배울 만한 점이 있다. 즉 법은 성문화되어야 하고, 널리 공지되어야 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민주사회는 삼권 분립이니 법치가 더 발달한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제대로 법을 잘 만들고 있는가? 공정하게 법이 집행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의 법치도 위기임이 틀림없다.

계명대 윤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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