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자음과 모음

# 떠도는 말, 바람의 말 아카이브와 한 입양아의 이야기

# "나는 누구일까?"…사람 사이 심연과 소통의 어려움 표현

'니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등 여러 권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산문집을 출간한 김연수의 최근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었다. 산 자 혹은 죽은 자가 화자로 등장하면서 펼쳐지는 소설 속 이야기는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힘을 갖고 있다. 소설의 재미와 이야기꾼으로서 작가의 재능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이다.

동백꽃이라는 뜻의 '카밀라'라는 이름을 가진 20대의 주인공. 갓난아기 때 한국에서 미국의 백인 가정으로 입양된 여성이다. 카밀라는 양어머니 앤의 죽음 이후 독립해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아버지 에릭이 재혼하기 위해 집을 내놓으면서 여섯 상자 분량의 짐을 보내준다. 그 짐 속에는 입양아 카밀라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카밀라는 그 안에서 입양서류와 함께 보관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다. 사과 같기도 하고 홍등 같기도 한 붉은 것들이 잔뜩 매달린 나무 아래 몸이 왜소한 동양 여자가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카밀라는 그 사진에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의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자전소설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다. 어떤 뉴욕의 출판사에서 그 사진에 관심을 보이면서 카밀라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사과 같기도 한, 또 홍등 같기도 한 붉은 것의 정체는 동백꽃이었다. 카밀라의 어머니는 열일곱 살의 미혼모였으며, 그 사진은 당시 어머니가 다니던 진남여고 본관 앞에서 찍은 것이라는 사실들이 밝혀진다. 카밀라의 어머니 정지은이 지어준 아기의 이름은 희재였고, 어머니는 아기를 끔찍이 사랑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죽은 자인 지은은 딸 희재에게 고백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라고.

그러면 희재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희재는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입양 보내진 것일까? 처음 카밀라가 찾아간 진남여고 여성 교장은 교정 뒤편의 '열녀비'와 사당을 엄숙하게 보여주면서 "진남여고는 물론, 진남 전체에서 지금까지 미혼모라고는 없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니 감히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카밀라는 시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시청 직원은 신문사 기자를 소개해 준다. 기자는 카밀라의 사연과 사진을 기사로 실어주었고, 그 기사를 보고 진남의 사회단체에서 일한다는 한 명의 중년여성이 카밀라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어서 겪게 되는 한국에서의 여러 일은 카밀라에게 극심한 혼돈과 고통을 안겨준다. 마침내 그는 진남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책 속에는 재미있는 박물관 이야기도 나온다. 진남 이야기 박물관인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그것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는 1925년 호주 장로회 선교부 소속인 맥클레인 부부가 건축한 서양식 저택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진남 지역 이야기 박물관이자, 생활사 아카이브이다.

2009년부터 그간 진남시를 중심으로 떠돌던 구전 이야기들과 관련 자료를 수집한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진남 조선공업 사주인 이상수 일가와 노동자들의 갈등, 그리고 그 속에 얽힌 정지은과 진남여고 학생들의 가족사, 정지은 가족의 비극 등이 차례로 펼쳐진다. 복잡한 이야기의 갈래 속에 전체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포착해내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으스스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 소설에서 작가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과 소통의 어려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심연을 넘어 자신의 말들이 독자에게 와 닿기를 소망하며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신남희(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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