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요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서 나이 여든이 넘도록 장수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장 오래 생존했던 인물로는 올봄 96세로 타계한 작사가 반야월(진방남) 선생과 93세의 작곡가 이병주 선생을 먼저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년 전 94세로 세상을 떠난 가수 신카나리아(본명 申景女'1912∼2006)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가요계의 원로들 중에 여든을 넘긴 분들도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손인호, 금사향, 신세영, 손석우 등이 대체로 여든과 아흔을 넘겼습니다. 반야월 선생은 말년에 청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방송 출연을 아예 사절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만 신카나리아는 아흔 나이까지도 무대에 섰던 놀라운 가수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당시 너무 노쇠한 신카나리아의 모습에 놀라움보다는 탄식과 비감한 반응을 나타내었지요.
신카나리아, 즉 신경녀는 191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원산은 한국음악사에서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유명한 고장입니다. 김용환, 김정구, 김정현, 김안라 등 대중음악계의 뛰어난 음악인 형제들도 원산 출생입니다. 어릴 적 신경녀의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고 합니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건만 원산의 루시여자고보를 1학년까지 다니다 결국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적 재능을 달랠 길 없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테너 이인근의 누이동생 이옥현에게 성악의 기초를 지도받았습니다.
신경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극작가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이동악극단 성격의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함흥 지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원산의 유일한 극장시설이었던 원산관으로 들어왔습니다. 신경녀는 날마다 조선예술좌 배우와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다녔고, 그들의 연기와 노래에 깊이 도취되었습니다. 신경녀는 기어이 무대 뒤로 용기를 내어 임서방을 찾아가 대중예술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신경녀의 자질을 테스트해본 임서방은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염성 있는 자태에 호감이 느껴졌습니다. 신경녀의 노래는 마치 새장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의 어여쁜 카나리아가 들려주는 아름다움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예술좌 합류를 흔쾌히 수락하고, 이후 맹렬히 연습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경녀는 무대 위에서 임서방이 지어준 예명 신카나리아로 불렸고, 조선예술단과 신무대악극단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혹은 막간가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신카나리아의 첫 데뷔곡은 17세에 취입한 '뻐꾹새'와 '연락선'이란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들의 반향을 크게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정숙이 불렀던 '낙화유수'('강남달'의 원래 제목), '강남제비' 등을 악극단의 막간 무대에서 신카나리아가 너무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오히려 원곡을 부른 가수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카나리아는 나이 20세가 되기까지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듯합니다. 1932년 동아일보의 기사 한 토막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줍니다.
"연극시장에서 아직까지도 아모 지장이 없이 곱게 피고 있는 방년 십칠 세의 귀여운 존재… 신카나리아 양은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의 리듬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다. …연기에 있어서는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 곱고도 정돈된 그의 얼굴이 스테지에 나타날 때에는 관객의 시선은 그의 연기보다도 미모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12년 간 가능했던 언어치료사 시험 불가 대법 판결…사이버대 학생들 어떡하나
한동훈 "이재명 혐의 잡스럽지만, 영향 크다…생중계해야"
[속보] 윤 대통령 "모든 게 제 불찰, 진심 어린 사과"
홍준표 "TK 행정통합 주민투표 요구…방해에 불과"
안동시민들 절박한 외침 "지역이 사라진다! 역사속으로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