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49>항일운동에 앞장 선 김천의 우국지사

명성황후 시해 후 김천 전역 의병 물결…편강열·이명균 열사 앞장

김천 도심인 남산공원에 세워져 있는 편강열 의사의 순국추모비. 남산공원에는 항일 우국지사 추모비를 비롯해 김천이 낳은 시인
김천 도심인 남산공원에 세워져 있는 편강열 의사의 순국추모비. 남산공원에는 항일 우국지사 추모비를 비롯해 김천이 낳은 시인'문인들의 시비도 곳곳에 세워져 있고 옛날 도서관 건물은 미술관으로 새롭게 꾸며져 시민들의 휴식'여가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명균 의사의 고향마을에 세워진 추모비와 흉상.
이명균 의사의 고향마을에 세워진 추모비와 흉상.
남산공원에 있는 편강열 의사 순국추모비.
남산공원에 있는 편강열 의사 순국추모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 잎이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에겐 추사 김정희의 걸작 '세한도'(歲寒圖)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추사는 세한도를 그리면서 그림 옆에 쓴 제발(題跋: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나 주제 등을 적은 글)에 논어에 나오는 자구를 옮겨 적었다.

벽에 걸린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12월 들자 때 이른 추위가 매섭다. 날씨가 차가워져야 송백의 푸름을 알 수 있듯이 나라가 어려울 때 우국지사들의 충정을 알게 된다. 김천의 도심공원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남산공원과 자산공원에는 김천이 배출한 항일 독립운동가 애사 편강열과 일괴 이명균 의사의 기념비가 있다. 나라 잃은 설움을 곱씹으며 서릿발 같은 기개로 일제의 칼날에 맞섰던 님들의 발자취를 찾아 남산'자산공원을 찾는다.

"내가 죽거든 만주 땅에 묻고 왜놈이 판을 치는 조국에 이장하지 말라." 1928년 12월 6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한 편강열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병을 얻는다. 그는 일본인 의사가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거부하다 37세의 나이에 순국하면서 이런 유언을 남긴다. 김천에도 나라 지키기에 앞장선 열사들의 빛난 호국 얼이 곳곳에 서려 있다.

◆항일 독립투사 편강열을 모신 남산공원

애사 편강열(片康烈'1892~1929)의 발자취를 찾아 옛날 김천(도)역 인근에 있는 남산공원을 오른다. 돌계단 양쪽으로 일본식 석등이 남아 있다. 그냥 보기에 좋아 그대로 둔 것인지 아니면 민족의 아픔에 대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을 주기 위해 남겨두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산공원은 일제강점기에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치욕의 현장이다. 그런데 독립투사를 모신 입구에 일본식 석등이라니, 생각이 한참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가파른 계단 100여 개를 훌쩍 오르면 왼쪽으로 고을 군수'현감들의 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옆으로 편강열 열사의 기념비가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다. 편강열은 만주 연백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의병장 이강년의 휘하로 들어가 소모장이 되었다. 1908년 전국 의병이 연합해 양주에 집결해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 분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 귀향 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활약하다 안명근의 군자금 모금사건을 단서로 일어난 '안악사건'으로 체포돼 3년간 복역했다. 1914년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진목마을에 서당을 열고 황악산 자락 삼성암에서 무술을 교육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연백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구월산독립군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2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의성단을 조직, 무력 항쟁을 주도했으며 통일회를 결성하고 만주에 산재한 항일단체를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안창호'양기탁'이범석 등과 회동하기 위해 하얼빈에 갔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1924년 체포됐고, 신의주로 압송돼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이때 최후 변론에서 "비록 지금은 우리의 힘이 모자라 너희들 앞에 서 있지만 뒤에 두고 보자"며 재판장을 일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년여 만에 고문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돼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가 있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끝내 거부했고, "내가 죽거든 만주 땅에 묻고 왜놈이 판을 치는 조국에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1962년 건국공로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1980년 김천 남산공원에 순국기념비를 건립했다.

◆들불같이 일어선 김천의 민초들

편강열 의사 순국기념비 옆으로 남은(南隱) 여중룡(呂中龍'1856~1909) 의사 순충비(殉忠碑)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여중룡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김천에서 일어난 김산장의군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의병장에 이기찬이 추대돼 김산'지례'개령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포수 70여 인까지 참여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1896년 대구부로 진격하려다가 관군에게 급습을 당해 이기찬 등이 체포되면서 무위로 끝났다. 이후 흩어진 의병들이 소수로 나누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지례 거물리 전투 등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경북고등경찰요사'에 등장하는 교전만 21차례에 달한다.

갑오경장 후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면서 반일감정은 점차 격화된다. 여기에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조선 백성의 민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에 유림을 중심으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의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김천에서도 비밀결사 등을 통해 항일운동이 전개됐다. 청국청원신사단과 충의사, 신민회, 독립의군부, 조선민족대동단, 신간회, 오적제거계획사, 유림대표독립청원사 등이 대표적이다.

청국청원신사단은 김천 조마면 출신 이병구가 청국의 리홍장을 만나 일본군을 몰아내 달라는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충의사는 1895년 여중룡 등 김천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애국계몽단체다. 안창호'김구 등이 나서 조직된 신간회에도 김태연, 편강열이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역 출신인 여영조와 나인영, 이기 등이 을사5적을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한다.

특히 김천은 신간회 활동이 활발했다. 김천의 신간회는 1927년 전국에서 두 번째, 경북도 내에서는 가장 먼저 조직됐다. 김천지회는 금릉청년회 등 3개 단체와 대의원 38인을 조직했으며 1931년 해체되기 전까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고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된다. 1919년 33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에 유림대표가 빠진 것을 수치라 여긴 유림계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1차 세계대전 강화회의에 조선독립 승인 청원서를 제출하려다 발각됐다. 이때 김천의 최학길, 이명균, 이석균이 유림대표로 서명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전 재산 처분해 독립자금으로 보낸 이명균

남산공원과 마주하고 있는 자산공원 입구에는 일괴(一槐) 이명균(李明均'1863~1923) 의사의 추모비가 있다. 이명균은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권이 강탈되자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자금으로 보내고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쳤다. 1919년 영남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가 검거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고 군량총장으로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에 임명했다. 사재 2천 석을 처분해 10만원의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냈고 1922년 철공소를 운영해 조달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려다 발각돼 체포됐다. 이때 심한 고문을 받고 가석방됐지만 이듬해 순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고 1970년 자산공원에 순충기념비가 세워졌는데 비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글'박용우 특임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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