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철' 따라 살던 세상, '철'없이 사철 나기

계절 장벽 사라진 시대의 변화상

어렵게 개나리가 피더니 목련이 진다

개나리가 피다 지면 아카시아, 장미가 피고

아카시아, 장미가 지면 단풍 낙엽의 계절이 되겠지

그러다간 어느새 또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엄동설한이 되겠지

세월 빠르다

아, 사랑아

나는 지금 계절의 특급을 타고

정신없이 네 곁을 달리고 있다

('계절'-조병화 시인)

지구 온난화 현상에 여름은 좀 길어지고, 봄'가을'겨울은 다소 짧아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자연은 사계절이 분명하지요. 하지만 인간 세상은 이런저런 계절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먹고 누리고 즐기는 등 편리함은 얻었다지만. 잃어버린 계절의 맛이 솔직히 좀 아쉽기도 합니다. '철' 없는 세상을 들여다봤습니다.

◆연중무휴 세일 시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던 백화점 세일 소식. 하지만 요즘 백화점 세일은 '연중무휴'다. 정기세일은 물론 별별 이름을 붙인 세일이 365일 내내 이어지고 있는 것.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백화점 세일은 새해 및 봄'여름'가을'겨울 초입 등에 하는 정기세일이 전부였다. 하지만 요즘은 정기세일 사이와 사이를 일명 '별별 세일'로 채운다. 명칭은 특가전'초대전'기획전'제안전'할인페스티벌'이월상품전'창고대개방 등 다양하다.

매일신문에서 매주 한 차례 대구지역 백화점 소식을 전하는 '유통가 단신' 기사를 분석해 올해 1월부터 이달 첫째 주까지, 연간 백화점 세일 현황을 살펴봤다. 물론 미처 기사로 전하지 못한 세일 소식은 제외된 통계다. 대구'동아'롯데'현대 등 대구지역 백화점들은 정기세일 20여 건을 제외하고 모두 107건의 별별 세일을 진행했다. 기간으로 보면 백화점들을 통틀어 세일이 열리지 않은 주가 없었다.

별별 세일의 특징을 살펴봤더니 품목만 적을 뿐 정기세일과 다름없었다. 할인율은 최대 70%까지 나타나 정기세일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다. 한 백화점은 '정기세일 직전에 미리 특가전을 열어 세일 기간이 길어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한 백화점에서 특가전을 열면 다음 주 다른 백화점에서 같은 종목'브랜드의 특가전을 여는 등 별별 세일의 법칙도 읽을 수 있었다.

연중무휴 세일이 백화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달 5일 찾은 대구 동성로의 한 SPA(스파) 패션 브랜드 매장. 빨간 글자로 표시된 할인 문구가 의류 진열대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2주 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할인 문구는 다른 의류 진열대에 붙어 있었다. 이는 패션 유행에 맞춰 보통 1~3주마다 제품을 새롭게 출시하는 SPA 패션 브랜드 특유의 재고처리 방법이다. 할인 문구가 매장 내 여기저기로 옮겨 붙으며 상시 할인 행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 그러면서 가격 거품을 빼 저렴한 가격을 유지한다는 설명이다.

4일 찾은 동성로 로데오 거리. 이곳에는 각종 의류 점포가 모여 있다. 걷다 보면 몇 집 건너 한 집꼴로 '점포정리' 문구를 붙이고 '고별 세일'을 벌이는 것을 늘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점포정리 문구는 실은 사계절 내내 점포마다 돌아가며 붙는 것이란다. 이곳 대부분 점포는 '망해서'가 아니라 '세일의 최상급 표현'으로 점포정리 문구를 활용한다는 것. 한 점포 관계자는 "재고를 빨리 처분하고 다음 시즌 의류를 들여오기 위해, 또 주기적으로 간판을 새로 달아 '신장개업' 효과를 얻기 위해, 세일보다 강렬한 표현을 쓰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제철 사라진 농산물

연중무휴 세일만큼 제철 구분없이 구할 수 있는 먹거리도 소비자들에게 큰 만족을 주고 있다. 과일'채소 등 농산물이 대표적이다.

농산물 생산에 제철이 사라진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농업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농산물의 사시사철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또 하나는 열대과일 등 해외 농산물 수입이 늘어난 것이다.

시작은 1950년대였다. 농촌에 농업용 필름이 보급되며 '비닐하우스' 농사가 시작됐다. 이후 농촌에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기계화 바람이 불며 '첨단 원예시설'인 비닐하우스는 '백색혁명'으로 불리며 각광받았다. 그러면서 농촌에 원예농업의 비중이 높아져 농산물의 연중 생산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열대과일 재배는 1965년 12월 부산에서 생산된 파인애플과 바나나다. 한 농민이 부산 구덕산 중턱에 대형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파인애플 2천 그루와 바나나 나무 170그루를 심어 9년의 시행착오 끝에 대량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생산된 파인애플 1개는 1천원에 판매됐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35원이었다.

이후 짭짤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각종 '계절 파괴' 농산물 생산이 이어졌다.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1968년 4월 '6, 7월이 제철이던 참외가 벌써 시장에 나왔다'는 기사, 1970년 6월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된 호박'오이'풋고추가 쏟아져 주부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기사 등 계절 파괴 농산물의 종류가 점점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농산물의 '제철' 개념은 원래의 시기와 상관없이 '가장 많이 출시되는 시기'로 재정의되고 있다. 6월에 주로 나오던 딸기가 이제는 3, 4월 대표 과일로 정착한 것이 한 예다.

◆365일 대입 준비

겨울에 맛보는 수박처럼 계절 파괴 현상이 즐거움만 선사해주면 좋으련만. 대입 수험생들은 연중 내내 '빡빡하게' 이어지는 대학입시 전형에 초죽음 지경이다. 과거 추위와 함께 시작되는 '입시철'이 사라진 것이다.

대학 입시제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1985년 대입학력고사에 대학별 논술이 추가됐다. 학력고사를 치른 수험생들이 곧장 논술 교재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1994년 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됐는데, 1996년부터 수시전형도 시작됐다. 정시전형 외에 학생들의 응시 기회를 확대시켰다는 취지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시와 수시전형을 함께 준비하는 피곤한 수험생활도 시작됐다.

이후 변덕 부리듯 갈고 엎은 교육 정책만큼이나 다양한 대입 전형이 개발 및 적용됐다. 2001년부터 특차모집을 폐지하는 대신 특별전형'무시험전형 등을 확대했고, 추천서 제출과 심층면접 바람도 불었다. 2007년부터는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됐다. 그러면서 다양한 능력과 개성을 지닌 인재를 다양한 전형으로 뽑는다는 취지는 좋지만 그만큼 사교육 시장의 수업 종목만 늘렸다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전국 4년제 대학 198곳이 경쟁적으로 내놓은 대입전형 유형은 모두 3천186가지. 그래서 관련 설명회 개최나 대입 컨설팅 시장도 생겨나더니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 학교 상담 교사들조차 대입 전략 짜기에 쩔쩔매는 모습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사라지는 이사철'결혼철

봄과 가을로 대표되던 이사철과 결혼철도 사라지고 있다.

이사의 경우 세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하나는 고층이 특징인 아파트가 보편적인 주거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고가 사다리차'를 앞세운 포장이사 서비스가 퍼진 것이다. 굳이 더위와 추위를 피해 직접 이삿짐을 옮길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 미국에서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문에서 문까지) 방식으로 먼저 자리 잡은 포장이사 서비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부동산 경기 침체로 제때 전세금을 내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늘면서 세입자들이 이사철에 마음대로 이사를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 그리고 자녀의 여름'겨울방학 중 이사를 고려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우리 지역보다는 서울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다. 먼 지역으로 이사할 경우 자녀도 전학시켜야 하는데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 전인 방학 중에 한다는 것. 그래야 자녀가 수업 과목도 제대로 이수하고, 학교생활 적응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이유다.

전통적인 결혼철은 5월과 10월이다. 하지만 양가 부모들의 막연한 우려 탓에 윤달을 피하는 정도 외에는 결혼철도 사라지는 추세다. 경제적인 요인이 크다.

상견례까지 마치고 결혼을 준비 중이던 직장인 박모(35) 씨는 결혼식 날짜를 세 번이나 바꿨다. 전통적인 결혼철인 지난 5월에 처음 잡았던 것을 다시 지난달로 잡았다가 내년 1월로 또 미뤘다. 주택 마련 문제로 다소 갈등을 빚었기 때문. 박 씨는 "삼촌'이모 세대만 해도 한 번 결혼식 날짜를 잡으면 반드시 지켰다. 양가에서 길일이라며 신중하게 선택했기 때문"이라며 "결혼 준비 관련 부족한 부분은 결혼식 이후에라도 채워나가면 됐다. 하지만 요즘 자식을 결혼시키는 부모들은 결혼식 날짜를 아무 때나 미뤄서라도 결혼의 '완성도'를 꼼꼼하게 채우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웨딩업체들도 전통적인 결혼철을 성수기로, 그 외 시기를 비수기로 구분해 비수기 할인 행사를 펼치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을 찾는 예비부부들이 적잖게 늘고 있단다. 지역 한 웨딩 컨설턴트는 "비수기에는 예식장 대관료 반값 할인, 식대 할인 및 음료 무료 제공 등 프로모션을 펼치고 있다"며 "웨딩업체 차원에서도 바쁘지 않은 시기에 깜짝 이벤트 등 푸짐한 서비스를 제공할 여력이 생긴다"고 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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